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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미안해, 혜진아 / 박수정

등록 2008-03-14 20:41

박수정/르포 작가
박수정/르포 작가
삶의창
봄이 왔다는구나. 칼 같던 바람이 잠들었어. 조금 차긴 해도 바람이 많이 가벼워졌어. 3월에 아이들은 모두 한 학년씩 올라갔어. 2학년은 3학년으로, 4학년은 5학년으로. 5라는 숫자는 4보다는 훌쩍 높아진 느낌이야. 한 해만 지나면 6학년이 되니까.

봄이 왔다는구나. 사람들은 새봄이 왔다고 해. 새여름, 새가을, 새겨울이 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봄은 새봄이 왔다고 하지. 아이들은 새로운 교실에서 새 선생님과 새 친구들을 만났단다. 지난 12월 겨울방학 할 때 받았던 새 책을 챙기고 새 공책을 준비해 갔지. 풀이며 가위, 색종이, 색연필, 사인펜도 챙겨가고.

봄이 왔다는구나. 봄에는 새로 뽑는 일도 많아. 각 반에서는 벌써 회장도 뽑고, 부회장도 뽑았어. 친구들이 추천해서 후보로 나간 아이도 있고, 스스로 손을 들고 후보가 된 아이도 있지.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를 하겠다는 공약도 있대. 회장이 되었지만 차렷 인사 소리를 씩씩하게 하는 게 영 어색하고 쑥스럽기만 한 아이도 있지. 며칠 뒤면 전교 회장 부회장을 뽑아. 그래서 5학년 아이들은 학교 정문에 서서 아이들에게 자기만 친구를 뽑아 달라고 선거운동을 한단다.

봄이 왔다는구나. 봄에는 신청하는 일도 많아. 좀 있으면 시작할 특기적성 수업으로 뭘 하고 싶은지 설문 조사도 했지. 가수가 꿈인 친구는 춤은 기본이라며 방송 댄스를 적어냈대. 수업시간에 하는 특별활동도 벌써 정했단다. 영화감상반도 있고, 십자수반도 있고, 합창반도 있고, 발명반도 있고 …. 어떤 아이는 컵스카우트 걸스카우트를 모집한다기에 신청해 달라고 엄마를 졸랐지만 거절당했지.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봄이 왔다는구나. 이번 봄에는 시험도 봤단다. 며칠 전에 말이야. 국어·수학·사회·과학 네 과목을 보았대. 엄마들은 아이들한테 새 학년 문제집을 한 권씩 안기더구나. 아침에는 학교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학원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두 시간, 세 시간 공부하러 가는 아이들도 많더구나.

봄이 왔다는구나. 화이트데이라고 문방구 앞에는 크기도 빛깔도 다 다른 사탕이 잔뜩 있더구나. 오백원, 천원, 그보다 비싼 것도 있고. 어떤 아이는 친구들과 교환하기로 해서 모아놓은 용돈을 쪼개어 사탕을 사더라. 날마다 일하는 엄마한테 드릴 사탕도 하나 챙겨놓고. 사탕 사느라 써 버린 용돈은 방 청소, 빨래 개기, 안마하기, 설거지를 해서 다시 모을 거래.

봄이 왔다는구나. 겨울 점퍼가 이젠 어울리지 않아 엄마한테 떼써서 봄 점퍼를 사 입은 아이도 있어. 엄마가 골라주는 건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한참을 골라서 딱 맘에 드는 점퍼를 골랐다지. 신고 벗을 때마다 끈을 풀고, 묶느라 좀 귀찮긴 하지만 맵시 나는 캔버스 운동화를 사 신은 아이도 있어.

봄이 왔다는구나. 아이들은 겨울방학, 봄방학에 집에서 실컷 늦잠자고 뒹구는 것도 좋지만 학교 가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은가봐. 친구들과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학교 끝나고 잠깐이라도 가방 놔두고 뛰노는 일이 그리 신나는가봐. 알림장에는 분명 ‘놀이터에서 놀지 말기’라고 쓰여 있지만, 어른들은 밖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말이야.


봄이 왔다는구나. 그런데 봄이 왔다는 그 말은 거짓말이야. 봄은 오지 않아. 새봄은 오지 않을 거야. 네가 없잖아. 네가 돌아오지 못했잖아. 봄에 피는 꽃처럼 네가 살아오지 않았잖아. 봄처럼 가볍고 흥겹고 화사할 너를 잃고 세상에 봄은 오지 않아. 네가 없는 봄은 꽃이 피어도 모든 게 얼어붙은 한겨울이야. 혜진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가 맘 놓고 웃고 놀고 행복할 세상을 만들지 못해 미…안…해….

박수정/르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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