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공동체가 주는 선물 / 박수정

등록 2008-02-09 19:09

박수정/르포작가
박수정/르포작가
삶의창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후딱 오지 않았다. 한 시간에 넉 대 다니니, 길게는 15분을 기다려야 한다. 택시가 아니면 영 애매한 길이었는데, 몇 해 전 집 앞으로 그 길을 가는 버스가 생겼다.

버스를 타고 이틀에 한 번씩 한의원을 다닌 지 보름이 지났다. 그리 힘든 일을 하는 것도, 몸을 심하게 부리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른팔이 아파 혼자 민망했다.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몇 차례 받았다. 물리치료사는 친절했지만, 뜨거운 찜질도 전기 치료도 발라주는 파스도 소용이 없었다. 계속 아프다 해도 똑같은 치료다. 의사는 별 도리 없다며 물리치료만 받으라는데, 그 말 하는 시간이 채 일 분이 안 걸린다.

그러다 지난 늦가을, 아는 언니가 건네준 서울의료생활 협동조합 소식지가 떠올랐다. 스무 쪽 안팎 소식지였다. 거기 조합원인 언니는 조합에서 만든 한의원을 다녔다. 언니는 단지 아픈 데를 치료받는 환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조합원 모임과 행사에 참여하고 소식지를 만들면서 즐거워했다. 몸도 쉬이 피로하고 바쁜 사람이 자기 시간을 내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언니를 움직이게 할까 궁금했다.

서울의료생활 협동조합은 서울·경기 지역에 살거나 일하는 사람이면 한 계좌 2만원을 출자금으로 내고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조합에서 세운 우리네한의원과 우리네치과는 병원장이 주인이 아니라 조합원이 주인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의료가 일반적인 사회에서 조합원 스스로 건강한 삶을 꾸리고 소외된 이웃의 건강도 함께 고민하는 의료 공동체다. 이름은 진작 들어 알았지만 그저 약도를 보면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어디쯤이구나 하던 곳을 드디어 몸이 아파 찾아갔다.

처음 간 날은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들어갔다. 미리 시간을 예약한 조합원들이다. 조합원이 아닌 나는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상담하고, 쑥뜸 뜨고, 물리치료 받고, 침 맞는 모든 과정이 만족스러웠다. 아니, 침상에 누워 머리와 손·발·다리에 침을 꽂은 채 고마웠다. 세세하게 상담하고 마음 쓰는 의료진과 더불어 조합원들한테 고마웠다. 아픈 팔이 확 나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처음인데도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아픔만 아니라 얼굴 모르는 그 누군가를 생각했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꼭 다른 이를 위하자는 마음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방식을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그 혜택을 누린다. 침 때문에 꼼짝 못하고 누워서 ‘공동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공동체는 자기 공동체를 넘어 더 널리 다른 사람들도 품어 안는가 보다. 갑자기 이 공동체에서 공짜로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했다. 어쩌면 나와는 먼 거리라 생각한 다양한 공동체한테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게 내 삶일지도 ….

얼마 뒤 조합원이 되었다. 한 계좌 2만원이지만 내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어느 누군가도 선물을 받기를 바라면서 가입원서를 썼다. 뒷장에 참여하고 싶은 모임과 활동에 표시하라는데 우선은 건너뛰었다. 조합원으로 가입했다는 전화를 하니 그 언니는 “활동 의무도 있는데”라며 웃었다. 공동체에서 중요한 건 아마 그 움직임일 것이다.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는 대신 낯선 길로 걸었다. 걸으니 병원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겠다. 어디쯤이려니 하며 보았던 약도 여기저기를 내 나름대로 채우고 길도 몇 군데 찾았다. 더는 애매한 길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려도 택시나 버스 없이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건강과 나눔’의 이 공동체는 사회에 새로운 길을 내고 지도를 그린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봄볕처럼 좋은 기운을 나누어주는 공동체다.

박수정/르포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박찬수 칼럼] 1.

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박찬수 칼럼]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2.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도사·목사와 내란 [한승훈 칼럼] 3.

도사·목사와 내란 [한승훈 칼럼]

헌 옷과 대량생산의 폐해 [열린편집위원의 눈] 4.

헌 옷과 대량생산의 폐해 [열린편집위원의 눈]

[사설] 윤석열 구속기소, 신속한 재판으로 준엄히 단죄해야 5.

[사설] 윤석열 구속기소, 신속한 재판으로 준엄히 단죄해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