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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부끄러운 고백 / 박경철

등록 2008-01-25 19:51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삶의창
소양이 부족한 사람은 제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도 가끔 삐딱선을 타는 일이 생긴다. 그날 내가 그랬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지난달 어느 오후 7시에 서대문에서 강연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전에 삼성역 부근에서 있었던 행사가 늦게 마쳤다. 황급히 택시를 타려고 길에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미 6시20분을 가리켰다. 퇴근길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지하철도 노선상 도저히 제 시간에 닿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퀵 서비스였다. 일전에 어느 잡지에서 길이 막히면 퀵 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는 어떤 이의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퀵 서비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더니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퀵 오토바이를 보내주되 대신 헬멧을 반드시 한 개 더 가져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헬멧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법규 여부를 떠나 심정적으로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5분쯤 후 도착한 오토바이 한 대가 내가 지정한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여분의 헬멧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헬멧을 가져오라고 당부를 했는데, 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타박을 하자 그는 “손님, 퀵 서비스는 뒤에다 짐을 실어야 하는데, 여분의 헬멧을 싣고 다닐 공간이 없잖아요. 세상에 어떤 퀵도 헬멧을 두 개씩 가지고 있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태연하게 자신의 헬멧을 벗어서 내게 내밀었다. 당황한 내가 “아니 그럼 기사님은 어떡하고 그걸 내게 줍니까?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하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는 “저는 핸들을 잡고가는 사람이라 괜찮은데, 손님은 뒤에 타서 위험해요. 원래 사람 태울 때는 다 그렇게 해요”라고 말하며 어서 타라고 나를 채근했다.

부끄럽지만 순간 내 안에서 천사와 악마가 다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악마가 이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수백명이 기다리는 약속이라는 ‘명분’으로, 그렇다면 ‘늦더라도 그냥 택시를 타겠다’는 말을 삼켜버렸고, 또 그는 핸들을 잡은 사람이니 뒤에 탄 나보다는 위험한 상황을 먼저 인지할 것이라는 교묘한 논리로 그의 헬멧을 거부하려는 내 양심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잠시 후 결국 오토바이는 나를 싣고 꽉 막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타본 오토바이 뒷좌석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길게 늘어선 차와 차 사이를 지나갈 때면 내 무릎이 차에 부딪혀 깨질까 봐 두 다리를 잔뜩 오므려야 했고, 명동고가를 넘어갈 때는 가드레일 넘어 도로 밖으로 나가떨어질까 봐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하지만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매운 바람이었다. 출발한 지 오 분도 안 되어 입이 얼얼하고 코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내게 이렇게 소리쳤다. “손님 헬멧 앞에 보호막 내리세요. 안 그러면 추울 겁니다.” 그 말에 내가 손을 들어 헬멧 앞에 달린 넓은 투명 보호대를 내리자 희한하게도 찬 바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꽉 막힌 강남 지역의 도로를 거쳐, 한남대교를 넘어, 명동고가를 지난 다음 정확히 약속시간 3분 전에 서대문역 인근에 도착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토바이에서 내린 다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려고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아까와는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볼과 코, 그리고 귀는 붉다 못해 거의 검어져 있었다. 내게 헬멧을 벗어주고 매서운 한겨울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결과였다. 그때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날 무엇과도 바꿔서는 안 되는 타인의 소중한 안위를, 알량한 몇 푼의 돈과 바꾼 샤일록이 되어, 그의 오토바이가 떠난 거리에 한동안 서 있어야만 했다.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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