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수석부국장
편집국에서
‘후미에’라는 일본 말이 있습니다. 가톨릭을 금지했던 에도막부 시대에 관리들이 신자를 색출하던 방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그림판을 밟고 지나가게 했습니다.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고, 그러지 않는 사람은 죽었습니다. 배신을 한 사람은 목숨은 건졌지만, 신조를 지킨 사람은 목숨을 내놔야 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끔찍한 종교의 수난시대였습니다.
최근 인수위원회가 각 부처를 상대로 업무보고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무원들에게 스스로 ‘자기부정’을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고교 평준화와 ‘3불 정책’을 교육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교육인적자원부 공무원들은 기부금 입학제를 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 해제, 대운하 건설에 반대 또는 부정적 의견을 지녔던 경제 부처 공무원들도 하루아침에 철학을 바꾸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안이하다” 등의 질책이 쏟아집니다.
저희는 첫날 교육부 보고 때부터 인수위가 공무원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정권이 바뀌었으니 …’하고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둘쨋날인 3일의 금감위, 국정홍보처 보고를 지켜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부처 공무원들을 상대로 인수위 업무보고 방식에 대한 반응을 취재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조와 체념,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곤혹스럽기는 한데 어떻게 하겠는가” “인수위가 이번으로 세번째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푸념이 쏟아졌습니다. 4일치 1면 머릿기사 “인수위 ‘속도위반’ 지나치다”는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기사에 공감을 하는 독자들이 많았지만, 일부 비판도 있었습니다. “이미 국민이 이 정권의 정책을 심판하고 이명박 정권을 택했으니 정책이 바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겨레는 이명박 정권 발목잡기를 하지 말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정책도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희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처럼 공무원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면서까지 속도전을 펼치는 것은 새 정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저희 판단입니다. 또 중요한 정책의 변경에는 선거 이외의 또다른 의견 수렴도 필요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공무원은 정무직과 일반직으로 나뉩니다. 정치적 책임은 장·차관 등 정무직이 지고, 일반직은 묵묵히 맡은 일에 충실하라는 뜻에서 나온 제도입니다. 그런데 인수위는 정치적 책임이 없는 일반직 공무원들을 데려다 놓고 ‘반성문’과 ‘충성서약서’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앞으로 데리고 일할 사람들을 그렇게 ‘만신창이’로 만드는 게 과연 새 정부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 일반직 공무원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공무원들이 이런 수모를 받게 된 근본 원인은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번에도 그런 모습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핵심 고위 공무원들이 재빠르게 변신해서 ‘점령군’ 행세를 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공무원들에게 영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절로 터져나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서 하지 않는 것! 복잡한 정치 세계든, 평범한 개인사든, 세상살이의 기본 이치가 아닐까요.
오태규/수석부국장 ohtak@hani.co.kr
오태규/수석부국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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