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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파지 줍는 할아버지와 손자 / 박경철

등록 2008-01-04 19:17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삶의창
주중에 서울에 와서 아침 나절에 지하철을 타면 버려진 신문을 회수하는 어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내가 5호선을 탈 때면 공덕역쯤에서 같은 시간이면 늘 보이는 어른이 계신다. 연세가 거의 팔순은 되신 듯한데, 의사인 내 눈에 건강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을 뵐 때마다 늘 아슬아슬했다. 핏기 없는 낯빛이 그랬고, 키가 잘 닿지 않는 선반에 팔을 내밀어 신문을 집을 때의 거친 숨소리가 그랬다. 겉으로만 보아도 영양실조와 폐쇄성 호흡기 질환이 분명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어른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작업실이 있는 충정로의 어느 빌딩 주차장에서 박스를 모으고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지하 2층 주차장 구석에 있는 분리수거장 주변에 차를 세우다가 어른을 다시 뵙게 된 것이다. 어른은 그곳에 있는 박스를 모아서 하나하나 펴고 계셨고, 그 옆에는 스무 살 정도 돼 보이는 청년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백설기를 먹고 있었다. 어른은 박스를 모으시며 옆의 청년에게 연신 뭐라고 말을 걸고 계시는데, 청년은 떡을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차를 주차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르신, 혹시 지하철에서 신문지 주으시죠?” 그러고 보니 내 질문이 마땅치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내가 다짜고짜 신문을 줍는 분 아니냐고 물었으니 어른이 경계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다. 어른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아마 건물에서 무단으로 박스를 가져가시는 것을 두고 내가 탓하는 것으로 여기신 듯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인연이라면 내 쪽에서 본 인연이지, 어른으로서는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어르신 다른 건 아니고요, 제가 의산데 어르신 기관지가 많이 나쁜 것 같아서요. 혹시 병원은 다니세요?” 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어른이 경계의 눈길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른의 지난한 삶과 구절양장의 곡절을 들을 수 있었다.

어른은 6·25에 월남해 남대문 시장에서 짐을 지던 분이셨다. 서른에 얻은 아들이 취직을 하고 장가를 가고서야 비로소 어른은 등짐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손자가 세 살이 될 즈음 아들 내외가 자던 방에 연탄가스가 들었고, 아들 내외가 그길로 어른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그나마 문 쪽에 자던 손자만 살아남았고, 그 손자가 지금 저 청년이었다. 하지만 손자 역시 생명을 건졌을 뿐, 그길로 뇌성마비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신 지금은 손자와 함께 단둘이서 살고 계신다고 했다.

손자는 낮에 고속버스터미널 주변에서 휴지를 판다고 했다. 손가방에 100원짜리 휴대용 티슈를 가득 담은 손자는 터미널에 내리고, 어른은 그길로 지하철을 옮겨 다니며 파지를 줍는다고 했다. 그렇게 헤어진 할아버지와 손자는 이 시간에야 다시 만난다고 했다. 어른은 늘 점심으로 손자가 가장 좋아하는 백설기를 가방에 넣어주지만, 손자는 하루종일 그걸 먹지 않고 있다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때서야 이렇게 떡을 먹는다고 했다. 예전에 터미널에서 백설기를 먹다가 노숙인 한 사람에게 떡을 빼앗긴 이후로 생긴 버릇이라고 했다.

하루에 3500원을 버는 노인과, 사흘에 한 번은 휴지 판 돈 몇 천원을 다 빼앗기고 오는 손자가 오늘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했다.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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