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저희 신문사 5층 복도 한쪽에는 한겨레의 지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떠나신 송건호 선생은 여전히 꼿꼿한 선비의 모습으로 사진 속에 살아 있습니다. 요즘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계신 리영희 선생의 강단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제는 속절없이 늙고 시들어 가는 선후배 동료들의 팔팔했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 슬며시 미소가 나오고 세월의 무게를 새삼 깨닫습니다.
요즘 이 복도를 지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신문사 초창기 흑백사진들로 눈길이 갑니다. 창간기금 모금 거리홍보, 양평동 공장지대의 창간 사옥, 안기부 한겨레 난입 편집국 압수수색 …. 비록 걸친 옷은 초라했으나 그 안에 깃든 의연한 기상과 신선한 정열은 하늘을 찌르던 시절입니다. 이 신문의 한쪽 귀퉁이를 맞잡고 지난 20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사진들 앞에 서면 언제나 새로운 의욕이 솟아오르곤 합니다.
새해 2008년은 <한겨레> 창간 20돌이 되는 해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스무살의 혈기방장한 나이에 접어든 셈이지요. 하지만 한겨레를 둘러싼 공기는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한겨레가 앞으로 무척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바깥세상의 걱정 어린 관심도 높습니다. 저희들 사이에서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오갑니다.
대선 전 몇달 동안 저희 신문사 안팎에서는 “<한겨레>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센 두개의 권력과 동시에 싸우고 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삼성 비리 의혹,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도덕성 문제에 대한 줄기찬 추적보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삼성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막강한 ‘최대 자본권력’이요, 이 후보는 이미 그때부터 당선이 확실시된 ‘최고 정치권력’이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싸움’이란 표현 자체가 왠지 거슬립니다. 비리 의혹이 있으면 마땅히 파헤치는 게 언론의 책무요, 유력한 대선 후보의 도덕성에 의심이 가면 진실규명을 통해 유권자의 선택을 돕는 게 당연한 사명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한 행동이 이례적인 일로 치부되고, 궤도이탈이 오히려 정상으로 둔갑하는 세상입니다.
어쨌든 싸움의 여파는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당선자 진영에서 제기한 거액의 소송은 이제 본격적인 절차밟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삼성 광고는 지면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본이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 데야 뭐라 말하겠습니까. 권력이 ‘사법 대응’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 것을 말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건전한 비판마저도 불온시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그 옹졸함과 편협함이 씁쓸할 뿐이지요.
하지만 한겨레는 결코 흔들림 없이 계속 이 길을 걸을 것입니다. 노심초사하거나 절치부심하지도 않습니다. 상대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맑게 깨어 있으렵니다. 언론은 언론의 길을 가면 그만일 뿐, 굳이 그 앞에 ‘비판’ 따위의 유치한 수식어를 붙일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을 명징한 눈으로 보고자 합니다. 추위 속에서 오히려 더욱 빛나는 송백의 푸르름을 보여주려 애쓸 뿐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자본이나 권력뿐 아니라 언론이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할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공동체 모둠살이를 일으켜 세우고, 소외된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한겨레의 영원한 책무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새해 인사를 하루 앞당겨 전합니다. 김종구 편집국장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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