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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삼성 대 ‘마이클 클레이튼’ / 임범

등록 2007-11-30 18:13

임범/영화 프로듀서
임범/영화 프로듀서
삶의창
며칠 전 개봉한, 조지 클루니 주연의 <마이클 클레이튼>을 봤다. 요 근래 나온 영화들과 다르게, 인간에 대한 애정과 탐구가 스며 있었다.

거대기업의 소송을 6년 동안 맡아 온 변호사 ‘아서 에든스’가, 거꾸로 그 기업의 비리를 폭로하고자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당연히 삼성과 김용철 변호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주인공은 아서가 아니라 아서와 같은 법률사무소의 절친한 동료 ‘마이클 클레이튼’이다. 영화는 거대기업의 비리에 맞선 영웅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소시민적 태도로 쫓기듯 살아온 이가 동료의 돌발적 행동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중계한다.

마이클도 로스쿨을 나왔지만 법률사무소에선 아버지와 형 모두 경찰인 마이클에게 소송 업무 대신 경찰서에 갇힌 이를 빼내는 등 급한 형사 사건의 뒤치다꺼리를 맡겨 왔다. 마이클의 형이 그를 비난하며 말한다. “너는 경찰이 보기엔 변호사이지만, 변호사들이 보기엔 경찰이야.” 마침 딱한 처지의 처남을 도와주다가 마피아의 돈까지 꾸게 돼 곧 갚아야 할 처지다. 법률사무소 대표에게 가불을 부탁하니까 아서가 사고치는 것(기업 비리를 폭로하는 것)부터 막으라고 한다.

“지금 기업에서 널 소송하면 넌 지게 돼.”(마이클) “넌 소송에서 날 이길 수 없어.”(아서) “난 네 적이 아니야.”(마이클) “그럼 넌 누구야?”(아서) 복마전 같은 뉴욕의 법률사무소 안에서도 신뢰를 이어왔던 둘 사이가 순식간에 깨져 버린다. 누구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주는 안타까움이 충격적일 만큼 강렬하다. 잘 된 연출이 갖는 현실의 환기력은, 아직도 영화라는 매체를 존경하게 하는 원천임이 틀림없다. 그 장면에서 난 지금 이곳의 마이클 클레이튼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내용대로라면 삼성 사태가 여기에 오기까지 적색경보가 여러 곳에서 울렸다. 삼성 내부는 물론이고, 검찰,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회계법인, 화랑계에서 …. 김 변호사의 말은 비리에 가담하거나 묵인한 이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지만, 그곳엔 꼭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리의 냄새 속에 살면서 일부러 후각을 죽인 채 자기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있을 거다.

마이클도 그랬다. 구체적인 증거까지는 몰라도 자기 주변의 세상이 비리 속에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서에게 말한다. 이 바닥이 허접하다는 걸 몰랐냐, 왜 새삼 그러냐, 자칫 너만 다칠 텐데 …. 진심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럼 넌 누구야?”라는 아서의 질문 앞에, 그 진심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 그 낭패감은 애써 잊고 지내던 삶의 초심을 환기시키고, 가뜩이나 돈 때문에 고심하던 마이클을 더 큰 불안으로 내몬다. 그 속에서 마이클은 파산한 처남을 보며 아들에게 말한다. “넌 절대 저렇게 무기력한 낙오자가 되지 않을 거야.” 그건 마이클 자신에게 하는 말기도 하다.

낙오자가 돼선 안 된다는 두려움에 초심을 갉아먹히며 사는 이들. 그렇게 빛바래 가는 자기 존재감을 회복할 계기를 찾을 수 없거나 찾지 못하는 이들을 우리는 소시민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무뎌진다면 그들은 행복할 수도 있지만, 주변에서 아서나 김용철 변호사가 나오면 마이클 클레이튼처럼 그대로 있을 수 없게 된다. 더 무뎌지거나 아니면 초심에 다가서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확실해졌다. 삼성 사건은 정의의 회복이나 부패 청산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들의 자존과 우리 사회의 희망에 관한 문제다.

임범/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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