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정치팀장
편집국에서
지난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정계복귀 및 대선 출마 선언을 지켜보는 마음은 답답함과 착잡함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이 전 총재가 내놓은 모순투성이의 출마변이나 말바꾸기 행태 때문만은 아닙니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정치 지도자 한 사람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끝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켜낸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요?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마저도 각각 3당 합당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이 전 총재 역시 자신의 욕심을 다스리는 데 끝내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이 전 총재 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라 약속 번복을 쉽게 용인하는 국민의 책임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한겨레> 편집국에서는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 움직임이 가시화하면서 이를 어떻게 보도할지를 놓고 긴 시간 토론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정치부 기자들로서는 이 전 총재의 복귀만큼 좋은 기삿거리가 없습니다. 그의 재등장이 ‘이명박 대세론’에 어떤 영향을 줄지, 범여권에는 유리한지 불리한지 등은 ‘정치공학적 분석’의 좋은 재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 기사에 지나친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정치행태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설이나 칼럼 영역에 넘기는 게 옳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전 총재의 퇴행적 행태를 엄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 다수였습니다. “정치판에 온통 선수와 응원단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심판이 없다.” 지난주 열린 아침 편집회의 자료의 한 구절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정치행위를 보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고민하는 이회창, 퇴행하는 정치’ ‘후보 불안론은 사실상의 경선 불복’ ‘이회창 출마 100인 유권자위원회에 물어보니’ ‘모순투성이 출마선언’ 등의 날선 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확한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성찰적 시시비비 가리기’는 이번 대선에 임하는 한겨레의 흔들림 없는 ‘보도원칙’입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검증 역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비비케이(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 도곡동 땅 차명 보유 의혹 등을 한나라당 경선 이후에도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은 대통령 후보에 대한 검증은 아무리 가혹해도 지나칠 게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최근 ‘침묵’이 그의 ‘경선승복-백의종군’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한 ‘긴 침묵, 원칙 잃었나’는 기사 역시 이런 차원에서 작성됐습니다.
범여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국민경선’이 ‘동원경선’으로 전락했다는 점을 저희는 누구보다 앞장서 지적했습니다. 앞으로도 범여권의 후보 단일화 논의가 정책과 가치에 근거하지 않고, 지역과 나눠먹기로 이뤄지는 구태를 보인다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대선이 막판으로 치닫는 요즈음, ‘이제는 졸업했다’고 생각했던 ‘구태’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 전 총재의 복귀로 상징되는 정치의 퇴행,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이 보여주는 재벌의 폐해, 연세대 편입학 비리 사건에서 드러난 우리나라 상층부의 도덕성, 곧‘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 등등. 우리 사회가 다시 혼돈과 부패, 퇴행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한겨레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해 봅니다.
백기철/정치팀장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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