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영화 프로듀서
삶의창
내가 법조기자로 있던 1992년 초, 법원에선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 양산되고 있었다. 기존 판례에 따라 언제나 ‘유죄’가 선고됐고, 형량도 관행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러던 때 대법원이 한 국가보안법 사건을 대법관 전원합의체에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건 곧 판례 변경을 검토한다는 말. 나름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이적행위에 대한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된다는 것으로, 기존 판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소수의견이 붙어 있었다. 그 요지는 “이적행위에 대한 미필적 인식”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적표현물 소지죄는 검사가 이적 목적을 입증해야 하며, 제작·배포죄도 그 표현물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위험성을 담고 있어야만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소수의견을 주도한 이가 이회창 당시 대법관이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은 자유와 평등이고, 그것은 개인의 인권과 인격의 존중에 밑바탕을 둔 것으로 집단보다 개인에게서 더 높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집단 또는 반대자의 의사와 상반되는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필수적 요건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그 대표적 징표이기도 하다. …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경쟁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사회에서만 건전하고 실질적으로 보전될 수 있다. … 사상의 경쟁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다.”
소수의견에 담긴 이런 표현들이 당연한 말인데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내용뿐 아니라 명쾌한 단문으로 이어지는 그 문장도, 2~3쪽짜리 판결문 전체가 한 문장이기 일쑤였던 당시로서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러 젊은 판사들이 이 소수의견을 추켜세우며 이회창 대법관을 사표로 삼는 듯했다. 솔직히 판사들이 답답해만 보였던 그 때에, 판사라는 직업을 달리 보게 한 계기가 이 소수의견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있던 중견 판사였는데, 그는 모든 분야의 법과 판례의 기원과 변천사를 놀라울 만큼 해박하게 꿰고 있었다. 사회가 변하는 데서 법이 어떻게 대응해 왔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해 어떤 가치를 중시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명쾌한 설명과 함께 그에게서 풍기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매력적이었다. 그 역시 이회창 대법관을 존경하는 듯했다. 몇 해 뒤 그가 법복을 벗었을 땐, 몇몇 신문에 “좋은 법관들이 자녀 과외비 부담 때문에 변호사로 나선다”는 기사가 실렸다.
97년 대선 당시 변호사로 잘나가던 그로부터 이회창 후보 캠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다. 정치를 할 사람 같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이 후보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또 한번 놀란 건 홍성우 변호사, 이부영 전 의원 등 운동권 안에서도 선망이 높은 쪽에 속했던 이들이 이 후보 캠프에 합류하는 걸 보고서였다. 확실히 이 후보에게는 기대를 갖게 할 무엇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터졌을 때, 내가 매력을 느꼈던 그 법조인은 문제의 차를 몰았던 사실이 밝혀져 구속됐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 사람은 안 변했는데 상황이 나빴던 걸까. 한나라당 총재가 된 이회창 후보는, 법원에서 아직도 그의 소수의견을 무시한 채 단지 ‘미필적 인식’만으로 유죄를 선고하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변했고, 마침내 엊그제 ‘좌파정권 종식’을 내걸고 세번째 출마를 선언했다.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 사람은 안 변했는데 전략만 바뀐 걸까. 어떻든 출마 발표문에서 10년 전부터 그에게 기대를 가졌던 이들을 염두에 둔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임범/영화 프로듀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