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안동신세계종합병원장
삶의창
밤 11시 서울 지하철 충정로역 3번 출구 계단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신의 발아래 통로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드는 기린과 원숭이 모양의 인형 몇 개가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인형들을 파는 사람인 듯했다. 인형들은 지하철 복도 바닥에서 혼자서 춤을 추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댔지만 그는 마치 그 인형들과는 무관한 사람인 양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인형을 사려고 해도 말을 붙이기가 어려운 모양새였다. 축 늘어진 좁은 어깨와 낡은 운동화. 그리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베이지색 봄점퍼가 지금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무심코 그의 곁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나그네는 가던 길을 재촉했지만 웬지 그의 절망적인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역을 나와 걷다가 다시 오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웬지 그가 가진 그 인형을 누군가 하나쯤은 꼭 사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새 그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며칠 후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그를 다시 발견했다. 이번에도 그는 계단에 앉은 채 발아래 펼쳐 놓은 인형들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에게도 나처럼 아빠를 찾는 귀여운 딸이 있을 터였다. 인형을 하나 사려고 그에게 다가서는 순간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멈추어 버렸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가 지나고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공기업에 다니던 그가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회사에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압박했고, 자존심 강한 그는 한직으로 밀려나기보다는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다. 퇴직금과 저축, 그리고 담보대출까지 모두 쏟아부어 꽤 규모가 알찬 고깃집을 열었다. 많은 지인들이 그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했다. 몇 달이 지나 가게가 겨우 안정될 즈음 광우병 파동이 발생했다. 자리를 가득 채우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고깃집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한달 두달, 상황이 지속되면서 사채를, 그리고 카드빚을 내더니 결국에는 문을 닫았다. 40년 가까운 노력들이 일거에 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카드빚에 쫓기는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그때 그가 나를 마지막으로 찾았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병원에 정수기를 한 대 들여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미등록 정수기 영업사원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게 더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내가 무심한 사람이었다. 잘나가는 친구들은 먼저 찾으면서도, 그에게는 내 쪽에서 먼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회에서도 그의 소식은 바람에 실려 무심히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의례적인 안부도, 악수도 청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인형이 얼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라도 한 듯 서로가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 네 소식은 잘 듣고 있다. 나는 뭐 이렇게 산다.” 그가 한 ‘나는 이렇게 산다’는 말에 비로소 무장해제가 된 느낌이 들었다. 명함을 건네고 악수를 하고 “꼭 한번 연락해라”라고 말하고 돌아섰지만 나는 비겁했다. 나는 명함을 건넴으로써 면죄부를 받은 셈이지만 ‘꼭 한번 연락하라’는 내 말은 그 순간 그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들렸을까?
2주일이 지난 지금 그는 그곳에 다시 나타나지도 내게 연락을 하지도 않고 있다.
박경철/안동신세계종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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