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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선한 싸움꾼 박순희 / 박수정

등록 2007-10-26 18:08

박수정/르포작가
박수정/르포작가
삶의창
열여섯 아녜스(세례명)는 초등학교 선생님 되는 게 꿈이었다. 아버지가 철도 노동자로 일하셔서 배는 곯지 않았지만 1960년대 딸이자, 언니이자, 누이였던 그 시절 여성들이 그랬듯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학교 대신 공장으로 가야 했다.

처음엔 노동자가 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노하고 방황했다. 다니던 성당도 발길을 끊었다. 공순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괜히 주눅 들었다. 일을 끝낸 밤이면 학원을 찾았다. 어떻게든 공부해 선생님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노동자가 되지 않겠다고 어금니 악물었다.

직포기술자가 된 뒤 성당에 가자는 친구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속은 외로웠다.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만난 게 그때다. 신부님께서 “노동자는 온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하셨다. ‘인간은 존엄하고, 노동이 중요함’을 들으면서 귀가 번쩍 뜨였다. 기쁜 마음으로 일을 했다. ‘작업대는 미사 드리는 제대’가, ‘노동은 기도’가 되었다. 노동운동을 신앙으로 삼았다.

1970년 11월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을 듣고는 두려웠다. 전태일이 간 길,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간 길이 두려웠다. 그 길을 피하려 수녀가 되고자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기 길은 노동자라는 걸 받아들였다.

아녜스는 기능공으로 원풍모방에 입사해 노조 부지부장이 되어 조합원들과 함께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하나씩 찾고 쌓아갔다. 요구하고 투쟁하고 연대했다. 자부심이 생긴 원풍 노동자는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을 판매 1위로 만들었다. 초등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던 양복지 ‘킹텍스’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부지부장 아녜스는 어린 양성공들한테 언니이자 엄마였다. 현장을 돌면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조합원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보면 화장실 가는 것도 놓쳐 병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별명이 어디든 멈추어 서는 ‘완행버스’였다고 한다. 상근 임기를 마치고는 부지부장이면서도 현장에서 기계를 잡고 일하였다. 가장 몸을 낮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던 거다.

군부독재 정권은 80년을 앞뒤로 민주노조를 하나씩 죽였다. 마지막으로 82년 9월27일 원풍 노조를 강제해산시켰다. 해마다 그 날이면 원풍 노동자들이 모인다. 올해는 날을 앞당겨 9월 초에 모였던 조합원들이 지난주에 다시 모였다. 큰언니였고 엄마였던 부지부장 언니가 어느새 환갑이 되었다. “여전히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잔치냐”고 했지만 원풍 노동자들과 70년대 민주 노동운동 동지들도, 80년대 전북 지역을 시작으로 한 전국 노동사목 동지들도, 90년대, 2000년대로 이어진 노동운동과 반전 평화운동 동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나섰다. 이제까지 주기만 한 그이도 한번쯤은 받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원풍, 와이에이치, 청계피복, 반도상사,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전남제사, 고려피혁, 서통, 해태제과, 남영나이론, 한일도루코, 대일화학 등 70년대에 민주 노동운동을 한 노동자들과 이소선 어머님, 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님이 아녜스와 함께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4절까지 불렀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갈 꽃다운 이내 청춘.”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거다. 이들이 한국 경제를 일군 걸, 배고픈 보릿고개를 끝낸 건 이들 덕분이라는 걸, 민주니 평화니 평등이니 그런 것도 권력자가 내던져준 게 아니라 저이들이 싸워 얻었다는 걸 …. 40여년, 박순희 아녜스는 선한 싸움꾼으로 노동자 한길을 간다.

박수정/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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