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변호사
시민편집인칼럼
30여년 전. 신문에 연재되던 <별들의 고향>을 아버지 몰래 열심히 읽었다. 박정희가 한 신문에 광고를 못 싣게 할 때는 반 친구들과 돈을 모아 백지광고도 냈다. 이제 그 또래가 된 우리 아들은 전혀 신문을 보지 않는다. 인터넷 포탈의 파편 같은 기사 몇 개 보는 게 전부다. 아버지는 지연·혈연의 전근대를 살았다. 그리고 나는 엄숙주의, 이성의 근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고 폭탄주며 와인의 놀이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내 아들은 원하는 것은 대충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시대를 산다. 일본가요며, 내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죽고 죽이는 온라인 게임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상이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비좁은 손수레와 좌판 사이를 걸어가는 청량리 사람들과, 겨울에는 반팔, 여름에는 긴 스웨터와 부츠를 싣는 강남 사람들은 사는 세상이 다르다.
<한겨레>는 어디에 근거해서 누구를 위해 신문을 만들어야 하나? 내 아들도 청량리 아저씨도 강남 여인도 아마 <한겨레>에는 관심도 없을 터.
신문은 속성상 이성, 근대에 터 잡을 수밖에 없다. <한겨레>를 만드는 이나 보는 이 모두 중간 이상의 계층이지만 지향은 저 낮은 곳을 향해 있다. 그래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중계방송하는 게아니라 ‘있어야 할 사실’을 기획하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겨레>마저도 여론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보이는 것은 아쉽다.
대표적인 예가 문국현 보도다. <중앙일보>는 이미 지난 8월27일치 신문에서 기획기사로 한 면을 모두 털어 김용옥의 문국현 인터뷰를 실었다. 그 뒤 <한겨레> 정치부 차원에서 스트레이트 기사가 이어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기획기사는 한 달 뒤인 9월22일에서야 대선주자 대담의 일환으로 다뤄졌다. 그가 이번 선거에 던진 의제들은 바로 <한겨레>가 평소에 관심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여론조사 5%대를 밑돌고 이를 대폭 끌어올리기에는 두 달 남짓의 기간이 짧아 보인다. 그렇긴 해도 문국현은 그 인터뷰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한파 때 3교대를 4교대로 바꾸어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고 학습기회를 주었다거나, 지속 가능한 발전과 환경 중시, 남북 상생이 필요하다는 등의 주장을 폈다. 여론 지지율이나 당선 가능성을 떠나서 이번 선거판에 꼭 던져야 할 화두라 여겨진다. 최근 들어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면이 많아진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민노당에 대한 지지가 10%안팎을 유지해서가 아니라 <한겨레>가 적극적으로 기획한 결과였다면 문국현 역시 그가 던진 여러 의제의 이성적 가치 때문에라도 앞으로도 적극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한나라당이나 범여권 신당에서도 여론조사 결과 반영을 두고 경선이 깨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여론조사가 우리 앞날을 좌우하고 있다. 어떤 사안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여론조사와는 별 상관이 없다. 지난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타결 때는 심지어 구체적인 협의 내용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언론이 일제히 여론조사를 했다.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잘 모르지만 남들이 찬성하니 나도 찬성한다.’ 남들 다 하는 여론조사를 <한겨레>만 안 할 수도 없는 처지가 이해는 간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는 여론조사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그만 거두자.
신문, 아니 <한겨레>의 근거는 이성, 근대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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