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그 음악가의 집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곤 했다. 당대 유명한 음악가는 물론, 문인, 화가, 동네 푸줏간 주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자신의 연주를 듣기 원한다면 누구든 기꺼이 초대했기 때문이다. 단지 음악을 즐긴다는 점이 중요할 뿐, 서로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음악가의 이름은 폴란드 출생의 고도프스키다. 한국에서 이런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사회적 계층과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적 소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 서열 체제는 현대판 신분제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만 18살 때 입학하거나 하지 못한 대학 간판이 죽는 날까지 따라다닌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 대학 간판과 그 연장선상에서 결정되는 명함, 이 두 가지는 한국 사회 구성원의 모든 것이다. 사람 됨됨이나 교양, 개성과 사회문화적 소양도 이 두 가지에 종속되며, 따라서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같은 대학과 학과, 비슷한 명함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방식에서 정치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슷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선 이 두 가지에 의한 스테레오타입들이 형성된다.
사회 구성원은 오로지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를 위해서만 경쟁하고 공부할 뿐, 이 두 가지가 결정된 다음에는 거의 자기 성숙의 모색을 하지 않는다. 자신과 싸우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숙시키기엔 이 두 가지의 억압이 엄중한 것이다. 드물게 그 결과를 사회가 인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 가치관에 부합될 때뿐으로, 암기와 문제풀이로 일관된 시험을 통한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처럼 인문학적 소양과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작용하지 않는 점은 마찬가지다.
한때 외환위기가 부른 ‘명퇴’ 현실이 대학 간판과 명함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전화위복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대학과 직장이지만 실상 그것이 그리 많은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경험은 그간 외면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배반당했고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어린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에게 보내는 위선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대학 간판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회, 대학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혼이 화제가 되고 그 결혼의 파국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학력차로 설명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대학 간판과 무관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과정을 무시하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미래 세대가 이미 어릴 때부터 그렇게 훈련되고 세뇌되면서 광란의 학습노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학력 위조 파문은 ‘남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자율성의 명제를 찾기 어려운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괴물적 현상인데, 그것은 또한 대학 간판이 개인의 재능과 자질을 얼마나 억압하는지 말해준다. 대학 서열 체제의 혁파가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이며 허접한 경제동물의 사회를 벗어나는 길임을 인식하기엔 대학 간판과 명함의 기득권은 워낙 강한데 교양과 상상력의 수준은 너무 낮은 게 아닐까. 바로 우리 사회의 대학 간판과 명함의 한계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연재홍세화 칼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