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우/온라인 부국장
한겨레프리즘
“좌절할 용기도 없었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서자마자 “하산하기 바빴다”고 말했다. 살아 내려가고자 감격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의 말투는 거침없는 산을 닮았다. 구기지 않고 쭉 펴서 이야기한다.
그는 손가락이 하나도 없다. 손가락이 잘린 데가 반질반질하다. 부드럽다. 엄지손가락은 뿌리만 조금 남아 껍질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그의 바짓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 소리가 울린다. 두 손으로 전화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한 손으로 핸드폰 한 쪽을 밀어올린 뒤 두 손으로 집어올려 귀에 댄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누른 채 통화한다. 연속 동작이 빠르고 자연스럽다. 목소리가 밝고 힘차다. 항상 웃는 표정 탓인지 얼굴 주름이 깊다. 산에 올랐다 열 손가락 모두를 잃어버린 사나이.
지난 5월 한국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에 오른 김홍빈(43·에코로바 홍보이사)씨는 지금도 살아남은 발가락이 시리다. ‘얼음이 드는 느낌’에 자주 시달린다.
김씨는 스물일곱이던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를 혼자 오르는 ‘객기’를 부리다가 사실상 숨졌다. 5700m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두 차례 정상 등반을 시도하다가 탈진했다. 하루만 쉬었다가 다시 한번 시도하자고 마음을 먹고 자다가 영원히 잠들 뻔했다. 미국 등반대에 혼수상태로 발견된 그는 심장 빼고는 거의 얼어 있었다. 구조용 썰매에 실려 16시간 하산하는 동안 외부에 노출된 손가락은 지독한 동상에 걸렸다. 허파와 뇌에는 물이 찼다. 의료진은 한국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장례 치를 준비하라고 했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홍빈아! 너는 오래 산다.” 깨어난 그는 석 달 동안 일곱 차례 수술을 하는 고통 끝에 살아났다. 그리고 귀국했다.
대소변도 혼자 해결하지 못했다. 양말을 신느라 뭉뚝해진 두 손에 펜치를 동원해야 했다. 손가락 없이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은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불렀다. 없어진 손가락이 살아나는 환영에 벽을 긁어댔다. 혼자 팬티를 입는 데 성공하곤 ‘엉엉’ 울었다. 최초로 히말라야 8000m봉 14좌를 완등한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63·이탈리아)를 동경하던 등반가의 꿈은 버려야 했다.
거름도 팔았고, 골프장·공사장에서 굴삭기도 몰아봤다. 장애인이 된 그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손가락이 4개는 있어야 한다는 규정에, 면허증을 딸 수 없었다. 김씨는 문득 ‘어렵고 힘들 땐 가장 잘하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산에 올랐다. 손가락만 없을 뿐, 그는 산 사나이였다.
고산 등정엔 상상하지 못한 고통이 따른다. 1998년 혼자 남미의 아콩카구아봉(6962m)에 오를 땐 정상을 눈앞에 두고 풀어진 등산화 끈을 매지 못해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다. 같은해 자신의 열 손가락을 먹어버린 매킨리봉을 오를 땐 바지지퍼를 내려줄 사람이 없어 하루종일 소변을 보지 못하는 고문을 견뎌야 했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에도 나흘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하루에 아홉차례나 설사에 시달려야 했다.
절망의 끝까지 갔던 그는 다시 꿈을 꾼다. 히말라야 8000m봉 14좌 가운데 아직 오르지 못한 10개 봉과 각 대륙의 최고봉에 도전하는 것이다. 올 가을엔 네팔 서쪽의 다울라기니봉(8167m)을, 겨울에는 남극 최고봉인 빈슨메시프봉(5140m)을 준비한다. 이미 고산에서 폐 등에 상처를 입어 보통사람보다 산에서 사망할 확률이 두 배는 높다는 김씨는 “앞으로 오를 산에 대한 설렘은 강렬하다”고 한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유혹이다.
이길우/온라인 부국장 nihao@hani.co.kr
김홍빈씨
김홍빈씨
이길우/온라인 부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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