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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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 사이에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이 천국이라는 것은 아마도 생활이 편리하고, 살림이 넉넉하며, 스트레스가 덜하다는 뜻이리라. 이와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미국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인사들도 있다. 미국은 규제가 적고 정책이나 국민정서가 친기업적이며, 모든 것이 자유경쟁과 시장원리에 맞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업하기 좋은 기업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미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미국 경제도 동일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윤 추구가 최상의 가치이며, 시장만능주의가 판치고, 공공성은 최소화되고 노동자의 권익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매우 피상적이고 일면적이다.
얼마 전 세계 최대의 부호이자 최정상의 기업가인 빌 게이츠가 하버드대학의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불평등에 일찍이 눈뜨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불평등 해소에 이용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빌 게이츠가 내년에는 은퇴하여 자선사업에 전념할 예정이며, 자식에게 경영권 승계는커녕 필요 이상의 유산상속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등과 함께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해 상속세 폐지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다. 유수한 기업인들이 걸핏하면 분식회계, 비자금 조성, 불법 정치자금 제공 등으로 범죄자가 되고, 각종 불법과 편법으로 경영권 상속을 도모하며, 심지어는 폭행죄로 재판까지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이 나와야 한다.
미국 기업들은 다 노동자를 맘대로 해고하고 노동조합도 없어서 경쟁력이 있는가?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예를 보자. 1971년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다른 항공사들은 한번도 해보지 못한 품질부문 3관왕을 11번이나 달성했다. 구성원의 80% 이상이 노조원이지만, 운영비용이 산업 평균에 비해 20% 적다.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고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른바 ‘펀’ 경영의 선두기업이다. 저비용으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종업원들의 애사심과 자발성이 필수적이었기에, 창사 이래 한번도 고용조정을 행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였다. 장기적인 교육훈련과 정보 공유가 뛰어나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사람을 중시하고 사람에 투자하기보다는 사람을 값싸게 쓰려고만 하고 기계와 설비투자에 집중한다. 이러니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노사관계도 적대적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때로는 기업 범죄하기 좋은 나라로 착각하는 것 같다. 대형 비리사건을 주로 수사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최근 4년간 기소한 기업 범죄 피고인에게 법원이 실형을 선고한 비율은 5%에 불과했다고 한다. 기업인들에 대해 우리 사법 당국은 무던히도 관대했다. 미국의 경우는 기업 범죄를 엄격하게 다룬다. 비근한 예로 회계부정 사태를 빚은 월드컴의 전 회장 버너드 에버스는 징역 25년형을, 엔론의 창업주 케네스 레이는 45년형을 선고받은 것을 들 수 있다. 기업 범죄는 개별 기업의 파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소액주주들의 권익까지도 갉아먹는 중대 범죄라는 인식이 미국 사법 당국과 국민들에게 뿌리 깊게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서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선진화하겠다고 하는데, 미국식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국식 중에서도 좀 좋은 것들을 찾아서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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