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칼럼
모처럼 친지들과 함께 <점프> 구경을 갔다. 아주 잘 짜인 무술 소극(笑劇)이었다. 인기를 반영하듯 자리가 꽉 찼는데 관객 중에 청장년과 초등학생만 보일 뿐 중고생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문화예술 감수성과 상상력의 진작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청소년에게 가장 맞춤한 소극이었는데 정작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6월의 화사한 토요일 오후에 이 땅의 중고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느라, 책을 읽느라 바쁜 것일까? 아니면 자연과 벗하려고 산과 들로 달려간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들 모두 교실이든 공부방이든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음을. 미성년인 고등학생들에게 “너는 1등급이다”, “너는 9등급이다”라고 매기는 반인권의 교육 환경에서, 옆 자리 친구를 누르고 한 등급이라도 올리겠다고, 그래서 어떻게든 상위권 대학에 들겠다고 안간힘 쓰느라 꽃봉오리 같은 아름다운 시절을 온통 저당 잡히고 있음을. 과거엔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만 저당 잡히면 되던 것이 점차 중학 시절, 초등 시절, 유치원 시절까지로 확대되고 있음을.
그러면 대학에 입학하면 오늘을 저당 잡히는 삶을 마칠 수 있을까? 대학생이 되어 느끼는 자유도 잠깐, 낭만도 잠깐, 대학 4년 동안 취업을 위해 또다시 저당 잡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직장을 얻으면 오늘을 저당 잡히는 삶을 끝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의 빠른 확대 속에서 일상화된 구조조정과 고용불안의 위협과 성과주의의 감시와 통제가 기다린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 닥친 1997년 외환위기는 물질 지상주의와 결합되어 사회구성원에게 아무도 나의 내일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학습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각자는 불안한 내일을 안전하게 도모하겠노라고 오늘을 저당 잡힌다. 청소년기, 대학, 직장의 모든 오늘을 빼앗기는 삶, 그런 삶은 당연히 오늘의 나에게 성실할 수 없고, 나에게 성실하지 못한 오늘이 타자에게 성실할 수 없다. 각자는 오늘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고, 이웃 간 배려와 관심, 연대를 기대할 수 없으며, 형제 간 우의도 사라지고, 재산 없는 부모는 학대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귀찮은 대상이 된다. 노동시간, 노동강도, 노동재해, 과로와 스트레스, 근골격계 질환, 자살률, 범죄율, 출산율 급감 등에서 한국이 세계 일등을 다투는 데에는 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불확실한 내일 때문에 오늘을 끝없이 저당 잡히는 삶을 강요당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 5월 빛고을 광주에서 아주 잠깐 빛났던 해방의 날들과, 1871년 봄 파리코뮌의 해방의 날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공권력이 물러난 광주에서 약탈행위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연대의 물결이 넘쳤다면, 프러시아 군에게 갇힌 파리 사람들은 쥐고기를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전에는 토론으로, 밤에는 축제로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들에게 해방의 빛은 어디서 왔을까? 내일은 모두에게 어차피 불확실하지만, 그 내일을 ‘함께’ 도모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 후보마다 우리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러나 교육과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사회안전망 확충과 관련하여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보를 멀리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정치노선은 국민에게 오늘을 저당 잡히는 삶을 더욱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살겠다는 경제동물이 아니라면.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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