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정치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미국 대선에서 자주 입에 오르는 징크스로 ‘14년 법칙’이란 게 있다. 주요 공직에 진출한 지 14년 이내에 대통령이 되어야지, 14년을 지나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14년의 ‘유통기한’을 지나고도 백악관에 입성한 이는 린든 존슨(23년)이 유일하다. 2004년 대선 때도 징크스는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1994년 텍사스 주지사가 됐으니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조지 부시가, 20년 동안 상원의원을 지낸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눌렀다. 이 ‘법칙’을 생각해낸 정치평론가 조너선 라우치는 “묵은 우유를 외면하고 새 우유를 찾듯이, 유권자들은 오래된 정치인에 식상해한다”고 말한다.
비슷한 주장은 또 있다. 1930~4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4선을 한 이후, 민주당 또는 공화당이 세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이긴 사례는 단 한차례뿐이다. 아무리 인기 좋은 재선 대통령을 배출했더라도, 그 다음 대선에서 집권당이 이기는 건 몹시 어렵다. 두 번 정권을 맡겼으니, 이번엔 다른 정당에 정권을 맡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유명 여론조사 전문가인 존 조그비는, 미국 대선에서 “부동표는 대개 (현직 대통령보다) 도전자에게 쏠린다”고 말한다. 요즘 미국 민주당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주춤하고, 초선 상원의원인 버락 오바마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것 역시 새로운 걸 원하는 유권자들의 심리와 무관치 않다.
지난주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참신하고 득표력 있는 ‘외부 인사’로 꼽혀온 그다. 이른바 ‘범여권’의 충격은 컸다. 최근 각 정파의 통합 움직임이 활발해진 건 충격과 불안감을 이기려는 몸부림의 성격이 짙다. 열린우리당이 급격히 흔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 전 총장을 끌어들이려 애썼던 쪽에선 배신이라도 당한 듯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자신을 불러주는 세력이 있기에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포기한 걸 두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정 전 총장은 대선 불출마의 이유로 “독자 정당을 만드는 게 어려웠다”고 밝혔다. 거대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빈사 상태에 놓인 마당에, 대선 출마를 꿈꾸는 이들이 따로 정당을 만들려는 걸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당 만드는 일보다는 정 전 총장 자신의 색깔과 비전을 드러내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여기서 실패했다. 지난해 12월 정 전 총장의 이름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 그의 지지율은 줄곧 1% 안팎에 머물렀다. 유권자들은 ‘정운찬’에게서, 기존 여권 정치인들의 한계를 넘어설 만한 뭔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신당을 만들고, 그 신당의 대선 후보 자리에 앉은 뒤에 본격적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서겠다는 발상은 이기적이고 안이하다.
정 전 총장이 주저앉자, 정치권에선 다시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이름이 떠오른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시민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해 온 점 덕분에, 참신성과 개혁성, 경영 마인드를 고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 것 같다. 문 사장도 정치 참여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 역시 ‘제2의 정운찬’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유권자들에게 먼저 다가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기보다는, 판이 다 짜진 뒤에야 ‘기회가 되면’ 들어오겠다는 생각이 강한 듯싶다. 그런 생각이라면 빨리 꿈을 접는 게 좋다. 정치는 참여하는 것이지, 어떤 자리를 약속받는 게 아니다. 정치인을 꿰뚫어보는 유권자들의 통찰력은 상상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정운찬 전 총장은 늦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상보다 일찍 현명한 결단을 한 셈이다.
박찬수 /정치부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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