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원/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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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젊은 남녀가 서울 지하철 객차 안에서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이들은 가난해서 예식장이 아닌 처음 만난 지하철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고 승객들한테 이해를 구했다. 결혼식 장면에 많은 승객들이 감동하였고, 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며칠 후 이 결혼식은 연극학과 대학생들의 실험극이었음이 밝혀져, 감동의 영상을 퍼나르던 많은 누리꾼들이 허탈해했다. 이 결혼연극이 쉽게 감동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연유의 하나는 예식장이 바로 수많은 시민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지하철 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로 33년 된 서울 지하철은 하루 약 800만 시민들이 출퇴근 시간으로 하루 한두 시간씩 몸을 맡기는 공간이다. 출근 시간 복잡한 환승역에서는 갈아타는 줄이 너무 길어 서너 번에도 채 못타는 일이 많고, 비집고 탄 차안에서 심하게 부대끼기도 하지만, 가끔은 긴 의자에 두셋이 듬성듬성 앉아 졸면서 머리를 흔드는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지하철을 타는 시간만큼은 빈부격차를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일단 타기만 하면 혼잡한 도로의 정체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출근시간의 지하철은 부족한 잠을 보충해 주기도 하고, 오늘 할 일들에 대해 미리 생각을 다듬거나, 집에서 서둘러 나오며 끼고나온 신문이나 챙겨온 무료 신문으로 하루를 살피는 시간을 준다. 한국인들이 책 안 읽는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움찔해 하던 터에 오랜만에 산 책 한 권으로 부족한 독서 갈증을 푸는 시간을 주기도 하고, 항상 쫓기는 영어 부담에 공부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다섯개짜리 칫솔 한 묶음을 1천원에 파는 중년에게는 치열한 생업의 공간이기도 하고, 무료승차한 노인들을 종묘로 탑골공원으로 동무들이 모이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고마운 공간이기도 하다.
알코올 중독자, 부랑자, 거리의 악사 등 지하철 주변의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처럼, 지하철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고 불청객은 없다.
언제부턴가 이 지하철 객차 안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이 특히 많이 타고 내리는 주요 역마다 영어어학원, 성형외과, 대형 의류매장 등 음성 상업광고가 승객들의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즐기면서 배우는 새로운 영어학원 아무개 역 몇 번 출구로 나오세요’ ‘이쁜이 성형외과로 오실 분 몇 번 출구로 나오세요’ 이런 식이다. 지하철 공사가 얼마의 돈을 받고 지난 해부터 음성 상업광고 대행권을 팔아 시작된 일이라 한다. 여러 시민들이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듣기를 강요하는 음성 상업광고에 대해 불편함을 하소연했고, 한 시민단체가 이를 받아 지하철 내 시민불편을 야기하며 지하철의 공익성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시에 음성 상업광고 중단을 요구하는 시민 감사청구를 제기하였다. 다행히 최근 서울시가 이 감사청구를 받아들여, 음성 상업광고가 지하철의 공공성에 저해되고 광고료가 경영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며 특히 시민들의 듣지 않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고 계속 실시 여부를 재검토할 것을 권고하였다 한다. 지하철이 단순히 시민을 실어나르고 돈을 받는 수송 수단에 그치지 않고, 시민의 다양한 선택과 삶이 담겨 있고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소중한 공적 공간임을 시민들과 서울시가 새롭게 이해한 의미있는 일로 볼 수 있다. 지하철의 시민들을 돈벌이 대상으로 생각한 불청객이 물러난 자리를 편안히 볼거리, 조용히 생각할 거리,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웃을거리로 채웠으면 한다.
신종원/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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