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산을 움직이겠다면서 산을 향해 걸어간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화는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자기부정의 용기일까, 아니면 자기중심주의의 일탈일까.
우리가 세상살이를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은 간혹 변절할 뿐 변하지 않는다. 일신의 안락과 영달을 위해 신념과 지조를 버림으로써 부정적으로는 급격히 변하는 반면에, 긍정적 변화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고 더디다. 스피노자가 강조했듯이 사람은 일단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인에게는 의식세계와 판단체계를 수정하는 지혜와 용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더욱이 권력자는 일상이 주는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도 여간해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자의 일상은 존재의 긍정적 권위를 훼손하도록 작용한다. 솔직하고 탈권위적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은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끝내 국민에게 사과하거나 자신의 판단체계에 질문을 던지는 대신 “도둑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 하는 데 그쳤다.
범인은 반대 의견에 조개처럼 반응한다. 평소 입을 열고 있다가도 자신을 건드리면 굳게 다물어 버린다.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범인의 귀는 듣고 싶은 말에만 열린다. 비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산을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것을 내면화한다. 토론과 설득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면 공격성을 띤다. 보통 사람의 공격성은 그 자체로 끝나지만 권력자의 공격성에는 국가기관의 물리력이 동원된다. 국민 세금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홍보하는 한편, 시민사회의 반대 집회를 원천 봉쇄하고 자발적 염출로 마련한 광고까지 봉쇄된다.
그 공격성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거나 농민들에게 경쟁력 없는 책임을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은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고 우리 농민은 계속 다른 부문을 위해 희생돼 왔을 뿐이다. 반면, 스크린 쿼터 축소 등 4대 선결조건이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무관하다는 주장은 누구의 거짓말이었나. 협정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다는 주장은 또 누구의 거짓말이었나. 3년 사이 무역적자가 4배로 늘어난 한-칠레 협정 결과는 누구의 거짓말로 드러났나. 그러나 그런 말은 이미 들리지 않는다. 미국에게 한국은 여러 나라 중 하나일 뿐이지만 한국에게 미국은 지구상 유일무이한 패권국이므로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도, 미국은 단 하나의 법률도 고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백 개가 넘는 법률을 고쳐야 하며 우리 자손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므로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17일째 청와대 들머리에서 단식농성 중인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견해의 차이를 넘어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무엇을 얻었나? 쇠고기, 투자자 국가소송제, 지적재산권, 의약품 특허 연장, 스크린 쿼터, 뉴스 제공업 등을 내주고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자동차를? 개성공단과 섬유를? 무역구제를?
산은 다만 거기 있다. 진리가 그렇듯이. 그것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기확신에서 벗어나 스스로 그쪽으로 가는 용기를 기대할 수 없을까? “경제적 실익을 따져 이익이 안 되면 체결 안 한다”, “합의가 어려우면 낮은 수준의 협정 체결도 가능하다”, “미국 의회의 협상 시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세 원칙이 또 하나의 거짓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연재홍세화 칼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