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제발 살려주세요, 기자님 / 이길우

등록 2007-03-22 18:28수정 2007-03-27 14:20

이길우 /온라인부국장
이길우 /온라인부국장
편집국에서
“제발 살려주세요. 기자님. 바로 오늘 저녁에….” “제 신분이 노출될까봐 두려워요. 저를 지켜주세요.”

흉악한 인질극의 한 장면 같다. 공포에 질린 인질이, 범인이 한눈 파는 사이에 간신히 신고하는 아슬아슬한 장면 말이다.

오늘도 〈한겨레〉 편집국에는 이런 내용의 제보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배가 신입생 후배에게 가하는 정신적·육체적 폭력에 대한 신고들이다.

어렵사리 대학문을 뚫고 들어간 자녀의 공포를 참다못한 학부모에서부터, 신입생 본인,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동료들을 말리지 못하는 재학생 등이 사이버 고발을 한다.

‘에이티’(AT)라는 용어가 있다. (“오늘 밤 에이티엔 한 명의 열외도 없습니다.”) 보통 학기 초에 하는 일반적인 ‘엠티’(MT·Membership Traning)가 아닌 ‘에이티’는 ‘애니멀 트레이닝’(Animal Training)의 약자라고 한다. ‘짐승처럼 굴린다’는 뜻의 은어로 신입생들에겐 공포의 단어. 신입생들은 이 ‘에이티’를 거쳐야 후배로 인정받는다.

‘과생활’이란 은어도 있다. 일부 체육대학 신입생들이 매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선배가 주도하는 체력훈련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강제로 시행되는 이 ‘과생활’ 때문에 신입생들은 아르바이트나 학원 수업, 심지어 미팅도 못한 채 시달린다고 하소연한다.

‘다·나·까’는 마치 신참 군인처럼 변하는 말 습관을 비유하는 은어다. 선배와의 대화에서 말의 끝을 반드시 “…니다”나 “ …입니까”로 끝내야 한다. 여학생도 예외는 아니다.

항공 여승무원을 육성하는 한 대학의 여학생들도 엄격한 생활 지침에 시달린다. 학교 주변의 저렴한 분식집에서 식사도 못하고, 버스 대신 택시만 타야 한다. 스튜어디스처럼 정장 차림에 머리도 올리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선배의 허가 없이는 수업이 끝나도 귀가를 못한다.


한 체육대학은 선배들이 하는 조회와 종례에 매일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복장은 운동복만 입어야 하고, 여학생들은 옆으로 메는 가방 대신 검은색의 뒤로 메는 가방만이 허용돼 고등학교 때보다 엄격하게 개인의 행동을 통제받는다. 한 여학생은 머리가 흩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200여개의 머리핀을 꽂아야만 했다.

한 제보자는 학과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선배의 ‘집합 명령문’을 첨부했다.

“난 00학번(2000년 입학생) 뻔대(학번 대표)입니다. 저에게 졸업이나 취업은 관심없습니다. 제가 속한 집단의 발전과 번영을 우선시합니다. 제 밑의 예비역도 모두 집합입니다. 통학생 그런 거 핑계 마세요. 다음주 수요일 저녁 8시, 사회체육학과에 소속된 학생은 다 체육관으로 모이십시오. 만약 오지 않으면 사회체육학과 학생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박탈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대면식’이란 용어는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그들에겐 익숙하다. 신입생들은 선배들과 인사하는 자리인 엄숙하고 전통적인 ‘대면식’을 준비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 서울의 한 대학은 지난해부터 이 ‘대면식’이란 용어를 ‘신입생 환영회’로 바꾸면서 폭력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를 모두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구타나 체벌에 대한 공포는 곧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져 창의력이나 도전 정신이 마비됩니다.”(허정운 중앙대 사회체육학과 교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선후배간 우의를 돈독하게 한다며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신입생들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익숙해지는 ‘마약’ 같은 작용을 한다. 내년에도 이런 제보를 받아야 하나?

이길우 /온라인부국장

niha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