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준 여론팀장
유레카
동서를 막론하고 자살은 금기와 명예의 두 얼굴을 지녔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독재자의 폭정, 질병과 고통, 지독한 가난 등 특정 상황의 경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인정했다. 유럽인은 목을 매는 자살을 경멸했다. 죽는 사람은 땅과 직접 맞닿아야 대지가 망자를 품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노예의 자살은 법으로 금지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을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로 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이 사회에 대해서도 부당한 짓이라고 했다. 중세 교회와 귀족들은 권력 행사 대상과 노동력이 준다는 이유로도 자살을 금했다. 따라서 자살자의 신분에 따라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이 갈렸다.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자살은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된 반면, 하층민은 주검조차도 공개재판을 받고 잔인하게 훼손당했다. 근대 계몽기 들어 자살은 ‘처벌’ 대상에서 ‘치료’ 대상으로 바뀌었다. 17~18세기에는 하층민과 도시 노동자, 어린이들의 자살이 급증했다.(게르트 미슐러, 〈자살의 문화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이 출간되자 젊은이들의 모방자살(베르테르 효과)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살적 태도의 발생 이론은 크게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이론으로 나뉜다. 일란성 쌍생아들을 대상으로 한 유전적 요인 연구도 있었으나 ‘자살 성향’보다는 ‘정신 장애’가 더 유의미한 연관성을 보였다.(토마스 브로니쉬, 〈자살〉)
한국의 자살률과 자살 증가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 중 단연 1위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최근 ‘한국의 자살 전염병’이라는 칼럼에서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경제·사회적 변동, 즉 고도의 도시산업화가 한국인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철학이 없는 과도한 경쟁과 양극화에 따른 절망이 주원인이라는 얘기다.
조일준 여론팀장 ilju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