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칼럼
“언론 자유의 일차적 요건은 산업이 아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충실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랑스에서 민중주체의 ‘자유언론’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을 했다. 아직 68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절, 그래서 신문 이름도 <리베라시옹>(해방)이었다. 한마디로, 민중해방의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신문은 로스차일드가의 소유가 되었다. 재벌 가문에게 포획된 ‘해방’의 처지는 상업주의의 도구가 된 체 게바라보다 더 참담한데, 신자유주의로 통합된 21세기에 언론이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이런 <리베라시옹>에 비하면, 레지스탕스 정신을 바탕으로 창립된 <르몽드>(세계)의 변모는 약과인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생존수단이 르몽드의 존재이유를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창립자 위베르 뵈브메리는 군수산업에도 촉수를 뻗친 라가르데르 재벌에 지분을 내준 오늘의 르몽드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문이 미디어산업의 하나로 머물 때, 소유가 신문의 지향을 규정한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그래도 로스차일드나 라가르데르는 기자들에게서 편집권을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지 않는다. 독자와 시민사회가 용납하지 않기에, 그와 같은 행위는 자본의 속성인 이윤 추구에도 부정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족벌자본 자체인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이 신문시장을 왜곡하면서 장악한 우리 현실은 그렇게 해도, 아니 그렇게 해야 최대의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반영물이다.
최근 <시사저널> 사태는 자본권력에 대한 언론의 자발적 복종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알게 해준다. 과거의 마름들이 지주에겐 개와 같은 충복이면서 소작농들에게는 늑대와 같은 존재였다면, 오늘의 마름들은 자본권력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을 농단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주가 지배하던 과거엔 ‘수치’라는 말이 아직 그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말까지 농단하는 오늘날엔 그마저 사라졌다.
시사저널 사장에게 독자와 시민사회의 분노와 항의는 삼성재벌을 향한 마름의 정체성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치를 모르는 마름의 행각에는 거칠 것이 없어서 기자들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빼내는 행위를 마다지 않는다. 실질적인 대체근로로 ‘짝퉁 시사저널’을 내놓아 독자들을 우롱함과 동시에 기자들의 파업권을 무력화시키더니 지난 22일엔 직장폐쇄를 단행하여 기자들을 거리로 내쫓았다. 게다가 ‘짝퉁’이라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서명숙 전 편집장, 고재열 기자와 이를 게재한 <오마이뉴스>를 고발했다.
그런데 여느 짝퉁은 진품에 비해 간혹 허접할 뿐 추하지는 않은데 ‘짝퉁 시사저널’은 허접할 뿐만 아니라 추하다. 아무리 사물과 현상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들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부당한 횡포에 맞서 싸우는 기자들과 연대하지는 못할망정 자본에 동원되어 그들의 뒤통수를 치다니 …. 그렇게 채워진 시사저널은 추한 짝퉁인 게 분명하다. 진품 시사저널의 진품 독자들이 펴는 “나도 고소하라” 대열에 이렇게 동참하는 것은, 그것이 시민사회의 일원이며 부끄럽게도 이 땅의 언론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1987년 6월항쟁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시사저널에 보내는 최소한의 연대 표시라고 보기 때문이며, 시민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자본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언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본의 오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성숙된 시민사회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성숙도는 그 사회가 누리는 언론자유의 정확한 척도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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