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준 여론팀장
유레카
마타하리는 세기의 ‘팜므 파탈’이자 ‘이중간첩’의 대명사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젤러였다. 1876년 네덜란드에서 난 그는 부친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 사별로 어려서부터 친척집을 떠돌아야 했다. 19살 때 식민지 인도네시아 주둔군 장교와 결혼했지만 7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간 그는 흥행사의 눈에 띄어 물랭 루즈의 댄서가 된다. 이 때부터 자신의 태생을 감추고 이름도 바꿨다. 마타하리는 인도네시아말로 ‘여명의 눈동자’란 뜻이다.
마타하리의 고혹적인 미모와 관능적인 춤은 단번에 유럽 사교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위층 인사들은 그의 환심을 사려 몸이 달았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의 운명도 꼬여갔다. 각국 정보기관은 정보원으로서의 활용가치에 주목했다. 마타하리는 내연남이 파산하자 새로운 물주를 찾아 1914년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갔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파리로 돌아왔다. 이 즈음 마타하리는 프랑스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행적은 영국과 프랑스의 의심을 샀다.
독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재입국했던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2월 ‘독일 간첩’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독일로부터 스파이 제의와 함께 돈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고 프랑스 고위층은 외면했다. 그는 총살을 당하는 순간에도 얇은 비단스타킹에 모피코트 차림으로 당당히 처형대에 섰다고 한다.
과거사위원회는 며칠 전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결정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귀순했으나 2년 뒤 위조여권을 이용해 홍콩으로 출국했다가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같은 해 7월 사형됐다. 이수근은 남한에서도 감시와 협박 속에 체제선전 도구로 시달리다 제3국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자유를 꿈꿨으나 영문도 모르게 ‘조작간첩’이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목숨이 이들뿐일까.
조일준 여론팀장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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