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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법정은 멀고 구속은 가깝다 / 김회승

등록 2006-12-25 18:15

김회승 논설위원
김회승 논설위원
아침햇발
일제 때만 해도 지금의 검찰 기능은 대법원 검사국이 담당했다. 정부 수립 직후 검찰청법이 제정되면서 독자 조직으로 분리됐다. 이런 뿌리 때문일까, 그래도 초기 검찰은 용감했다. 초대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수사 중단 지시를 거부하고 현직 장관을 독직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의 독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권력이 자신의 휘하로 편입된 수사·기소권을 가만둘리 만무했다. 권력은 검찰의 권한을 끊임없이 강화하면서 동시에 순치했다.

법원의 저항은 ‘찻잔 속 태풍’이었다. 5·16 쿠데타 세력은 사법부를 통제하려 형사법원을 따로 만들고, 검찰을 동원해 ‘용감한 판결’에 보복을 가했다. 이에 맞선 사법파동(1971년)은 이듬해 유신 선포로 일거에 제압됐다. 1987년 민중항쟁 이전까지 법-검은 충실한 권력의 시녀로 다시 한몸이 됐다.

얼마 전 검찰이 ‘국가 시책론’을 들고 나왔다. 법원이 시위 참가자의 영장을 잇달아 기각하자 “폭력 시위를 엄단하려는 정부 시책을 망각한 처사”라며 비판한 것이다. 법무부는 나아가 이런 ‘형사정책적 판단’을 구속 사유로 명문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사법 암흑기에도 그랬다. 형사사법 기능은 이른바 ‘국가 시책’에 호응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였다. 정부의 반공 시책에 맞춰 때마다 수많은 조작 간첩이 탄생했다. 사회 기강을 확립한다며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처벌했고,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며 수만명을 삼청교육대에 가뒀다. 국가 시책이란 이름으로 검찰은 정의와 인권을 내팽개쳤고, 법원은 피묻은 검찰 조서를 추인해줬다. 권력이 곧 법이던 시절에 법치주의가 기댈 곳은 양심적인 몇몇 변호사들뿐이었다. 헌법상 권리를 정책적 판단에 따라 제한할 수도 있다는 발상이 위험하고 두려운 까닭이다.

영미법이든 대륙법이든, 검찰과 변호인은 각각 원고와 피고의 대리인일 뿐 최종 판단은 법관의 몫이다.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법조 삼륜’이란 모호한 개념으로 세 직역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사법시험이라는 한배에서 난 이들이 카르텔을 만들어 사법 기능을 독식해 온 오랜 관행이 낳은 오해일 뿐이다. 직업 변호사들까지도 수십년 ‘법조인’이란 이름으로 판·검사와 대등한 위치를 누려왔다. 끊임없이 법원의 위상을 추락시킨 권력의 통제, 그리고 여기에 안주해 온 사법부가 자초한 결과다. 이런 마당에 대법원장이 느닷없이 ‘법조삼륜이란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정색을 하니 발끈할 수밖에. 누이좋고 매부좋던 시절은 그리울 만도 하다.

검찰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거 한국은행이 감독 기능을 빼앗긴 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상황을 걱정하는 듯하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통해 사실상 수사를 지휘하려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죽하면 누구보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검찰이 주요 재판 내용을 상부에 보고하는 법원의 관행까지 문제 삼겠는가.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할 정도이니, 법조계 안에서 ‘팬티까지 벗고 싸운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법정은 멀고 구속은 가깝다는 말이 있다. 검찰은 사실상 사법권을 행사해 온 왜곡된 관행에 대한 향수와 미련을 떨쳐내야 한다. 법원을 향해 써움을 걸 일이 아니다. 형벌권과 재판권을 위임한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지난 대선자금 수사 때 ‘국민 검찰’이란 명예와 신뢰를 얻지 않았는가. 독일 헌법은 ‘국민의 이름으로’ 판결함을 명문화하고 있다. 사법 권력 스스로 국민의 자리로 내려오면 신뢰는 거저 생긴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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