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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내가 ‘당신’인 세상 / 이길우

등록 2006-12-21 17:28

 이길우/온라인부국장
이길우/온라인부국장
편집국에서
그는 멋진 신사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전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뒤틀린 손가락으로 건반을 부드럽게 누르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조명 속에서 그의 경사진 고개가 리듬을 탄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본다. 그의 연주는 듣기보다는 보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땀이 흐른다. 때로는 건반을 잘못 눌러 불협화음이 나기도 했지만, 차라리 매끄러운 연주보다는 살갑게 다가온다.

그가 눈을 부라린 채 찡그린 표정으로 만들어내는 피아노의 운율이 장내를 압도한다.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그는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길고 진했다.

아! 우리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

지난 19일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한 인터넷 방송이 주최한 동영상 유시시(UCC) 페스티벌에 모습을 보인 뇌성마비 1급 장애우인 김경민(25)씨.

그는 한 달 전 자신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치는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에 동영상으로 담아 인터넷에 올렸다. 뒤틀린 손목과 손가락을 도구로 비교적 거칠게 창조해 낸 그의 연주 모습은 강인한 의지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이었다.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난 김씨는 태어난 지 100일부터 뇌성마비라는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여덟살까지 제대로 서서 걷지 못했던 김씨는 철이 들면서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축된 손목과 주먹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기까지는 1년이 걸렸다.

그는 비장애인이 하는 것을 뭐든 하려고 했다. 그리고 잘했다.

사이클 2년, 수영 2년, 스쿼시 1년, 헬스 2년 등의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2종 보통운전 면허를 따 장애인용 특수 차량이 아닌 일반 승용차를 운전하고, 무사히 사회복지학과 신학을 전공하며 대학교를 마쳤다. 현재 직업은 컴퓨터 출장수리.

그는 자신의 장애 극복 모습을 널리 보여주고 싶었다.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지 육체가 부자연스럽다고 움추려들기 싫었어요.”

그가 택한 수단은 인터넷. 그가 올린 피아노 연주 동영상은 하루 10만여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자살하려다 그 동영상을 보고 열심히 살려고 작심했다는 댓글도 달렸다. 김씨는 부모님과 쌍둥이 형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은 갚았다고 생각한다.

김씨를 만나기 하루 전인 18일에는 <한겨레>가 운영하는 개인블로거들의 마당인 <필진 네트워크>에서 활약 중인 몇 분을 회사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만난 필명 ‘겨울종소리’인 이경실(43)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이기도 했던 이씨는 결혼 후 글쓰는 것을 잊고 지냈다. 아이가 크고 여유가 생기며 이씨는 <필진 네트워크>에 필자로 등록해 틈틈이 삶의 이야기를 올린다. 이씨가 쓴 ‘어머니의 담배’라는 글은 남편과 자식 몰래 평생 담배를 피우며 시름을 달래던 우리의 어머니를 정겹게 묘사해 ‘인기상’을 받기도 했다.

‘사용자가 만든 콘텐츠’(UCC)가 주도하는 웹 2.0 시대가 열렸다. 2.0이란 숫자가 뭔지 모른다고 주눅들지는 말자.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자신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올릴 수 있다면 2.0을 즐길 수 있다.

평생 뒤틀린 사지를 원망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던 김씨나, 뒤늦게 자신의 글로 남에게 감동을 주는 이씨, 그리고 그들의 노력과 글 향기에 박수를 보내는 우리 모두, 시사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당신’(you)의 주인공들이다.

이길우/온라인부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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