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
성한용칼럼
최근 〈한겨레 21〉이 서울에 사는 40대 연령층 5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2007년 대선 쟁점’ 항목에서 흥미로운 답변이 나왔다.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을 기준으로 투표할 것 같다’ 74.6%, ‘현 정부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투표할 것 같다’ 24.7%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사실 5·31 지방선거로 이미 끝났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당 사수냐’, ‘통합신당이냐’를 둘러싸고 이전투구를 하고 있다. 내부 갈등이 깊어가는데도 당장은 ‘쪼개질 힘’조차 없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2월 말 전당대회가 끝나면 수습을 하거나 갈라서게 될 것이다. 기자들이 봐도 이제 여권 갈등은 기사가 잘 안 된다. 대선을 치르기도 전에 여당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그리고 이미 패배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왜 심판을 받았을까? ‘무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능한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말미암은 양극화, 생산력 과잉으로 발생하는 전세계적 디플레이션을 모두 노 대통령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잘못은 분명히 있다. 그 중에서 하나만 지적하자. 노 대통령은 집권준비를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됐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결과적으로 보면 ‘졸속’이었다. 예산이 정확히 얼마나 드는지, 위헌 가능성은 없는지 미리 충분히 따져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사법개혁안, 국방개혁안, 사회·경제 대책(비전 2030)을 내놓은 것은 집권 뒤 한참이 지나서였다. 집권 전에 정책 공약을 제대로 짜두었다면?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면, 청사진 곧‘로드맵’을 만드느라 취임 뒤 2~3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권 초기 동력으로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차기 대선주자들의 정책 공약에 벌써부터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경부운하 공약,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열차페리 공약은 혹시 졸속이 아닐까? 이 전 시장은 왜 색안경을 끼고 박정희 흉내를 내는 것일까? 박 전 대표가 ‘아버지’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이미지 전략이 아닐까? 고건 전 총리의 ‘10대 국가과제’는 왜 공허하게만 보일까? 이 사람들이 집권하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축적’을 다 갈아엎고 또 3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여야 정책위의장들이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매니페스토 법안’에 합의한 것은 지난봄이었다.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강봉균 의원이 4월20일 대표 발의자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냈다. “정당이나 후보자가 정책공약과 선거공약을 제시할 경우 각 사업의 목표, 우선순위, 이행절차, 이행기간, 재원조달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도록 한다”는 것이 제안 이유였다. 그런데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둘러싼 국회 파행으로 법사위가 마비됐다. 이 법안은 결국 지방선거가 끝난 지 6개월이 지나서 12월7일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잔치가 끝난 뒤에 음식이 나온 격이다.
국회 매니페스토 연구회(회장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는 내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을 위해 추가 입법을 준비하고 있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후보가 정책 공약집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둘째, 선관위에 매니페스토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다. 후보들이 공약에 대해 구체적인 이행 방안과 재원조달 방안을 직접 만들어 내놓도록 하기 위해서다. 쉽게 말해, 집권 전에 ‘로드맵’을 미리 짜서 보여달라는 얘기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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