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일/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나라살림가족살림
민주화는 대체로 실질임금의 상승과 복지의 확대를 낳고, 이에 따라 소득분배가 개선되고 대다수 서민들의 삶의 형편이 나아진다는 것이 역사에서 보는 일반적인 경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민주화 이후에 오히려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고용구조가 악화되고 있어, 과연 사회경제 정책에서 민주화의 영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실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된 뒤 우리나라에서도 임금이 상승하고 분배가 개선되는 전형적인 민주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민주화 정권으로 간주되는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기울어 더욱 반민주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김영삼 정부가 자본시장 개방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추진했고,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플러스’라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편향을 보였다. 공공부문 개혁을 한다면서 과도하게 규제완화, 민영화, 인원감축 등에 초점을 맞추었고, 노동개혁도 노사관계는 뒷전에 밀리고 노동시장 유연성만이 주가 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노무현 정부는 마침내 ‘좌파 신자유주의’를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력한 재벌개혁을 공약해놓고 이제 와서는 출자총액 제한의 대폭 완화나 폐지를 논의하고 있고, 동북아시대를 열겠다더니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민주화는 과거 독재정부의 자의적인 경제통제와 간섭에 대한 반작용과 경제가 성숙해가는 데 따른 필요 등으로 관치경제의 청산과 시장경제 이행이라는 과제를 낳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가의 통제력은 약화되는데 시장규율과 시민사회의 규율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함으로써 재벌이나 언론과 같은 민간권력이 더욱 강화됐고, 이는 경제정책 민주화의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한다는 정당한 요구가 재벌 등 특권집단의 영향력 탓에 왜곡되었으며,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이 점차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민주주의 발달에 따른 경제정책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첫째, 민주주의 발달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경제시스템을 낳았다. 민주주의 발달 초기에는 재산권 보호와 법치주의 확립으로 군주에 의한 자의적인 경제통제와 간섭을 배제하면서 자유로운 시장경쟁을 발전시켰고, 이후에는 독점에 의한 시장왜곡 등에 대한 정책 개입을 통해 시장경쟁의 공정성이 높아졌다. 둘째, 민주주의 발달은 인권 신장과 실질적인 기회균등 요구를 낳고, 이것이 국가의 인적자본 형성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당연시되던 아동노동이 금지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확대와 나아가 모든 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인적자원에 관한 국가의 역할이 더욱 발전되어 보육과 교육, 보건과 의료 등 직접적인 인적자본 관련 투자뿐만 아니라 연금이나 실업보험 등 포괄적인 소득보장을 실시하는 복지국가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민주화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분배를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매우 긍정적인 몫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성장동력 약화와 양극화라는 구조적인 난제에 봉착해 있다. 이 문제를 푸는 열쇠도 경제정책의 민주화에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질서의 확립으로 자원배분의 민주성을 높이는 것과 누구나 잠재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사람 투자를 확대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유종일/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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