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프로선수들로 이루어진 야구 국가대표팀이 사회인 야구를 주축으로 하는 일본팀에 지고 말았다. 예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최고 수준의 일본팀을 두 번이나 꺾었던 것이 엊그제이니 충격은 더 크다. 어떤 네티즌의 비아냥거림과는 달리 사회인 야구선수가 낮에는 초밥 요리사, 밤에는 야구선수 식의 순수 아마추어는 아니다. 고등학교 야구팀만 수천 개고, 진짜 초밥 요리사들이 즐기는 풀뿌리야구(흥미롭게도 일본어로 ‘풀야구’라고 한다)의 저변도 대단하다는 점에서, 몇 명의 탁월한 인재를 선발하여 초등학교부터 야구에 올인시키는 한국의 시스템과는 분명히 다르다.
굳이 야구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이 우리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과 놀랄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몇 개의 중점산업 및 기업을 선정하여 온갖 세제 및 금융지원, 때로는 권력자의 각별한 관심까지 곁들여 빠른 시일 안에 성장하도록 밀어주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한때 독재정권의 자화자찬에 지나지 않았던 ‘한강의 기적’이 세계적인 성공사례로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고등학교 야구팀 수천개 만들 돈도 열의도 없는 상황이라면, 집중적으로 몇 명의 박찬호나 이승엽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세계화의 흐름 앞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나의 영웅이었던 최동원 선수가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고 그저 한국에서나 알아주는 선수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덜 된 세계화’ 탓이 아니었겠는가?
개발독재 시절, 항상 민주화 세력의 대안으로 생각되었던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이루는 경제, 국내시장에 기반을 두면서 외국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내포적인 공업화였다. 개발독재의 결과적인 성공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세계화의 거친 물결 앞에서 내포적 공업화니 민족경제니 하는 용어들은 이미 그 시효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비단 야구가 아니더라도, 아니 우리의 삶은 적어도 야구경기 승패보다는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잘 나가는 이와 못 나가는 이 사이에 최소한의 힘의 균형은 흔한 말로 사회통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새벽까지 학생 가르치고 관리하면서 정작 수익의 상당 부분은 온라인 사교육 기업에 로열티로 낼 수밖에 없는 보습학원을 때려치웠다는 제자의 씁쓸한 웃음은 초밥 요리사한테도 지는 프로선수가 프로냐는 비아냥거림에 씁쓸해할 야구 관계자들의 얼굴 위로 겹쳐진다.
지금은 초등학교 교실 뒷벽에 1명당 국민소득 몇 천달러라는 목표를 붙여 놓고 성장을 향해 일로매진하던 시스템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져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국민소득 2만달러를 이룬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이 그에 비례해서 안락해지지는 않는다는 것, 예컨대 우리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매일매일 경험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시대라면 말이다.
구조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개인의 품성이나 노력만을 탓하는 것은 보수주의자의 상투적인 수법임을 경계해 마지않으면서도, 나는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풀뿌리의 보존을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형 유통업체 때문에 생존기반을 잃는 동네슈퍼, 때로는 정규직 때문에 고통 겪는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수많은 풀뿌리들. 이제는 오히려 ‘더불어 함께’라는 공공성의 화두를 붙잡고 나가야 할 때다. 설사 시장경제가, 그리고 세계화가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누구 말마따나 ‘때로는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므로.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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