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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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다가오면서 수백명의 자원봉사자가 광장에 모여 수천 수만 포기의 김장을 하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민간단체들과 기업들이 함께 참여하는 김장 나누기 행사는 그 규모도 장관이거니와, 나눔의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와도 같아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 김장 행사 현장에서 담근 김치는 대개 당일 혼자 사는 노인이나 복지시설, 도움이 필요한 가정에 나눠준다. 이런 행사들이 자칫 전시용이나 일회성 자선적 행사로 비칠 소지도 없지 않지만, 참여하는 당사자들의 진정성이 있고, 도움을 받는 이들이 소박한 기쁨을 느낀다면 그만큼 값있는 나눔도 많지 않다.
세밑은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주위의 이웃을 살피게 하는 시간이다. 세밑 풍속 중에 담치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풍물을 치며 집집이 돌아다니면 동네 어른들이 십시일반 곡식을 내주었는데, 이를 모아 노인만 사는 집이나 아픈 이가 있는 집, 쌀이 없어 떡을 못하는 집들을 찾아 담 너머로 던져주곤 했다. 누가 이런 곡식 자루를 주고 갔는지 알지 못했고 알아도 모른체했다. 동네에 함께 사는 가난한 이들도 추운 겨울과 명절에 밥은 굶지 않게, 조금이라도 떡은 해 먹을 수 있게 나누는 것이 이웃의 도리라 여겼다.
며칠 전 서울의 어느 서민주택의 2평짜리 전기패널식 단칸방에 세들어 살던 팔순 노인이 전기료를 아끼느라 전기를 끄고 자다 추위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달에 몇 만원 나온 전기료가 부담스러워 온기 없이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는 말도 들린다.
그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닥친 날, 요즘 연일 한 달 새 몇 억 원씩 오른 집값 얘기, 이달부터 시행된 종합부동산세를 거부하자는 움직임, 연말연시 해외여행 비행기표를 구하기 힘들고 유흥주점은 연일 불야성을 이룬다는 기사, 김장김치 몇 포기 받는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비치는 웃음, 한겨울을 날 연탄을 들여놓고 안도하는 서민들의 모습, 추위에 동사한 노인의 모습이 교차하는 착잡함을 지울 수 없다.
수년 전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때, 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실업극복과 어려운 이웃들의 삶을 보살피기 위한 국민운동을 펼쳤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종교, 기업, 시민의 경계를 넘어 힘을 모았다. 지금보다 사회안전망이 부실하던 시절, 서민 겨울나기를 위해 쌀 한 자루와 몇 가지의 생필품을 모아 나누는 일에 힘을 모았고, 많고 적음을 떠나 어려운 이웃에게 이 힘든 때를 함께 견디어 내자고 손을 내밀었다. 어려운 때를 함께 이겨 내자는 공동의 인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성과였다.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정말 고달픈 요즘이다. 생활비는 줄여 내핍한다 하더라도, 커가는 아이들 교육비에 뛰는 전세금 감당만 하기에도 벅차다. 그러나 서민살이를 정말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런 생활고뿐 아니라 담치기 풍속이 보여준, 정말 어려운 때 빈 쌀자루를 채워줄 이웃, 온기 없는 방을 살피며 군불 장작을 채워 줄 이웃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어떻게 작동하기에 난방비 걱정에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 체계를 어떻게 바꿔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다거나 하는 지적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웃의 사정을 살피는 데 마음을 쓰고 작은 돈과 시간을 내어 직접 나눔을 실천하는 일, 긴 겨울을 혼자 힘으로 견디어 내어야 하는 가난한 이웃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다.
신종원 서울YMCA 시민사회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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