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화제도 나이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지라, 386세대 언저리의 지인들을 만나면 아이들 학원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입시교육의 폐해를 개탄하다가, 또는 하룻밤 사이에 몇 천만원씩 오르는 아파트 값 얘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푸념 어린 좌절로 정리하곤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 옛날 이 세상에서 가장 최후에나 용서받을 악한들이 모인 것으로 생각했던 5공화국 정부가 과격하게 실행했던 과외 금지, 그리고 단 한번의 국가관리 객관식 시험 결과를 화투패처럼 들고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차라리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이었음에 동의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는 점이다. 어차피 학벌구조가 단기간에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라면, 지금처럼 수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몰두하는 것보다는 강력한 국가통제 아래 일등부터 수십만등까지 일목요연하게 줄을 세우는 방식이 학원비나마 절약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무한경쟁이 우리의 일상을 조이는 지금, 국민국가 차원의 강력한 통제가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국내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 높은 학벌의 피라미드를 좇아 외국으로 떠나는 이들을, 더구나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 앞에서 무슨 수로 말릴 것인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육문제와도 얽혀 있을 것이라는 혐의가 짙은 부동산 가격 문제는 또 어떠한가? 강남의, 새도시의, 또 무슨 지구 아파트의 대열에 끼지 못하면 완전히 낙오될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이들과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들의 한치라도 더 앞서 나가기 위한 노력에, 그 당사자가 재테크에 능숙한 청와대 수석비서관이건 짬짜미에 매달리는 장삼이사건 간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뜨거웠던 6월 항쟁은 벌써 이십년 전의 기억이건만, 그 벅찬 승리의 기억에도, 많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도 이러한 우려는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사교육 경쟁과 부동산 획득을 위한 절망적인 경쟁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차가 회복될 수 없는 것으로 굳어져 가는 우리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그들’과 애초에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사이의 벌어져 가는 심연을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구조, 최소한 그 구조를 만들기 위한 참여의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형식적 민주주의 달성 이십여년 만에 체념의 균형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사회적 합의의 틀을 만들어 낼 것이냐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지금 막 인터넷에서 확인한 어느 일간지 사설의 제목은 ‘시장의 복수’다. 그러나 진정한 시장의 복수는 그 사설이 주장하듯 우왕좌왕하는 이른바 ‘386 좌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입시교육이건 부동산이건 철저한 시장논리에 맡김으로써 고통스러운 과도기를 단축하고 끝내 이르게 되는 체념의 균형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닥으로의 절망적 질주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런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수록 그것은 실제로도 불가능해진다. 이는 또한 위기에 놓인 경제민주주의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민주주의가 경제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경제민주주의의 실패가 정치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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