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관습적인 방식으로 10년 전을 생각하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던 외환위기로 가는 길목이 떠오른다.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의사결정 기구는 마비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은, 북핵 문제로 한반도 주변이 요동치고 있는데, 집권세력은 지리멸렬하고 반대세력은 파당적이다. 예감이 썩 좋지 않다.
남한을 더 갈등적으로 만든 것은 북한 핵실험뿐만이 아니다. 정부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정책도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지난 10월27일 한-미 자유무역협정 4차 협상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는데, 아직 협상 타결의 윤곽은 오리무중이다. 미국은 한국의 핵심 요구를 모두 거부하는 강경 자세를 고수했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현재로서는 우리가 협상을 타결할 유인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이 어느날 덜컥 악수를 두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한편 정부는 내년 안에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개시할 계획을 밝혔다. 또 2004년 정상회담 이후 진행된 한-중 자유무역협정 공동연구도 마무리되고 있어 다음 수순을 모색할 시기가 되었다. 이쯤에서 한국은 자유무역협정 추진 전략의 현실성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전략은, 거대·선진경제권을 대상으로,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거대·선진경제권을 대상으로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굳이 이의를 달 필요는 없다. 자유무역이 성장과 후생 증대로 귀결될 수 있다는 이론적 인과관계, 우리 경제가 세계와의 무역·투자를 통해 성장 발전한 경험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구체적인 경로다. ‘한꺼번에’ 높은 수준의 시장통합을 단행했는데, 자원 배분과 재배분이 속도를 맞춰주지 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하나의 예가 농업 분야다. 주요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타결하여 2008년부터 쌀을 제외하고 협정 이행에 들어간다고 할 때, 이행기간 10년간 농업소득이 17조~29조원이 감소한다는 연구도 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 정도면 이행기간의 경영 불안으로 막대한 소득보전 조처가 불가피해진다.
예상되는 손실을 줄이는 방법은 자유무역협정 이행기간을 ‘길게’ 잡는 것이다. 협정을 추진하되, 이행기간을 통상적인 10년에서 5~10년 정도 더 길게 협상해야 한다. 그러면 현재 3분의 2에 이르는 60대 이상 농업 경영주들이 자연스럽게 은퇴하는 시기에 이행을 마칠 수 있다. 내년 3월로 시한을 못 박지 말고 끈기 있게 협상하는 것도 양국 모두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을 고려한다면, 더욱이나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과 중국은 제조업 부문에서 보완적인 산업구조를 갖고 있지만, 문제는 농업 분야이다. 농업 분야의 민감 품목을 정하고 이행기간을 길게 잡는 방식으로 한-중 협정을 추진해야 한다. 중국은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격차 해소를 위한 의제를 포함시켰다. 한국과의 협정 추진에서도 농업의 특수성을 고려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장 동력과 시장기회와 함께 동북아 지역질서의 안정을 고려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 없는 한-중 자유무역협정’이나 ‘한-중 자유무역협정 없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미국 중국과의 협정을 함께 추진하되,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으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 이행기간이 충분히 확보된 협정이어야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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