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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슬픈 박치기 /이길우

등록 2006-10-31 17:50

아침햇발
그는 경기장에 나무로 만든 관을 ‘질질’ 끌고 들어왔다.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다. 그는 상대방을 때려눕혀 그 관에 집어 넣겠다고 장담하곤 했다.

그리곤 링 위에 올라 두꺼운 송판을 이마로 격파하며 자신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의 주무기는 박치기. 아무리 격투기라지만 인간이 머리로 머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당시에도 생각하기 어려운 ‘필살기’였다. 상대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충격이 큰 일종의 ‘반칙’이기도 했다. 5초 동안 반칙이 허용되는 프로레슬링이기에 그의 박치기는 야만적인 행동이었지만 링에서 허용됐다.

1963년 미국 프로레슬링 무대에 등장한 청년 김일은 처음엔 그런 악역을 맡아야 했다. 프로모터들은 그에게 ‘정의의 사도’보다는 ‘동양에서 온 악당’ 역을 부여했고, 김일은 충실히 그 노릇을 했다.

일본에 밀항했던 김일을 자신의 신원보증으로 오무라 수용소에서 빼내 제자로 받아들인 역도산은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동족인 김일한테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엄했다. 스승이 부르면 김일은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곤 했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꾸중듣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진출할 준비를 하던 김일에게 역도산은 박치기를 단련할 것을 명령했다. 김일의 이마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훈련에 게으르다는 이유로 골프채로 이마를 맞아 피를 흘리기도 했다. 스승인 역도산은 스모선수에서 프로레슬러로 변신하면서, ‘가라데촙’을 개발했다. 마치 도끼로 나무를 찍듯(chop) 손날로 상대의 가슴을 타격하는 기술로 거구의 백인 레슬러를 쓰러뜨리며 일본인들을 열광시켰다.

스승의 열정으로 누구보다 단단한 이마와 목을 갖게 된 김일은 미국 무대에서 챔피언에 올랐다. 후일 김일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경기를 할때마다 링 주변에서 흥분하며 야유를 보내던 한 텍사스 할머니 팬을 회고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김일은 역도산이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길거리의 전파상과 다방의 흑백 텔레비전 앞에 모인 팬들에게 막판 통렬한 박치기로 승부를 뒤집으며 ‘정의의 영웅’으로 탄생했다.

프로레슬링이 짜인 각본에 따라 승부가 정해진다는 ‘소문’ 믿기를 거부했던 순진한 한국인들은 1965년 김일의 제자였던 장영철이 ‘레슬링은 각본에 따라 진행된다’고 폭로하자 큰 정신적 충격에 빠졌다. 상대방과 한 달 가까이 합숙하며 손발을 맞추던 프로레슬링의 공공연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고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로레슬링은 스포츠무대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김일의 수제자로 2004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이도규(51)씨는 “과격하게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은 가장 과격한 운동인 프로레슬링을 도태시키면서 의도적으로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를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지난 25일 영면한 김일은 끝내 이 땅의 프로레슬링 부활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프로레슬링의 승부조작 때문만은 아니다. 프로레슬링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링의 본고장인 미국에선 능력있는 시나리오 작가들이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인 각본을 만들고, 그 각본을 프로레슬러들은 연기자 이상의 ‘연기’로 소화해낸다.

고인의 빈소에서 만난, 불과 30여명의 현역 프로레슬러 가운데 한 사람인 남태령(39)씨는 “우리는 운동선수이지 탤런트가 아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출현하면 프로레슬링은 인기를 끌 것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어린시절 처음 접한 영어 단어인 ‘헤드 베팅’의 주인공 김일씨가 하늘나라에서는 박치기 고통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길 빈다.

이길우 온라인 부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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