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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라살림가족살림]대리번역의 경제학 /류동민

등록 2006-10-25 19:39수정 2006-10-25 19:42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인기 아나운서 출신 연예인이 베스트셀러 대리번역(또는 이중번역?) 문제로 홍역을 치르던 사태는 결국 그가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하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형태로 매듭지어졌다. 연예칼럼도 아닌 터에 특정인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 해프닝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해보고 싶은 직업병이 도진 탓에 다룰 수밖에 없다.

아주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사회과학 출판사 두어 군데서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번역가 노릇도 하고 교정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 번역문화의 비참한 실정이야 이번 사건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어쨌든 내가 확인하였던 것은 아마추어 대학생이 열 쪽씩 나누어 번역한 것이건, 전문번역가가 번역한 것이건 간에 그것이 온전한 책 모양을 갖추고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원고지 수천 장에 이르는 책을 번역하다 보면 제아무리 능숙한 전문가라 하더라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발생하는 오역을 찾아내는 것은 오히려 해당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외국어 실력도 달리는 편집자의 몫인 경우가 허다하였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설명하는데, 착취라는 용어가 주는 살벌한 느낌과는 달리, 그것은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얻은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를 특정한 개인이나 그룹이 가져가는 상황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요즘 학생들이 전가의 보도로 생각하는 지식검색 사이트의 진화 과정을 생각해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네트워크적 협력을 통해서야 비로소 올바른 지식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장밋빛 낙관으로 가득 찬 미래학이나 경영지침서들은 이러한 네트워크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지만, 민주적 통제장치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든지 ‘착취’의 도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이 해프닝은 말해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이미 삼십 년도 더 전에 설파한 것이지만(<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기호와 이미지가 상품의 본질적인 사용가치 그 자체를 대신하는 현대사회적 상황이 극적인 형태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진지한 인문학 서적은 몇 백 부도 팔리기 어려운 시장에서, 인세만 몇 천 만원에 이를 정도로 책을 샀던 그 많은 독자들 중의 상당수는 마시멜로가 가르쳐주는 삶의 지혜보다는 예쁘고 이지적으로 생긴 번역자가 상징하는 기호적 가치를 얻을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기호의 정치경제학’이야 세미나장에서나 논하면 그뿐이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고도 소비사회가 주는 중요한 혜택일진대, 김태희나 전지현의 기호에 탐닉하는 일상의 작은 즐거움까지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야 있겠는가?

그래도 대리번역이 문제가 된 것은 아직은 기호나 상징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적어도 당위의 차원에서는 그렇게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의 일상을 꽉 붙들어 매고 있는 세계화·시장화의 거부하기 어려운 물결과 함께 그러한 영역은 점점 소멸되어 갈 것이다. 기호와 상징의 시장물신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최소한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 시장의 전횡 속에서 최소한도의 민주주의적 통제를 확보하려는 것, 그래도 이런 꿈이라도 꾸어보는 것이 때로는 아파트값이나 주식값 때문에 고민하는 것보다 값질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나마 무기력한 경제칼럼이나 쓰고 있는 백면서생의 특권이 아닐는지?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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