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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비보잉-그 참을 수 없는 / 이길우

등록 2006-09-14 21:50

이길우 선임기자
이길우 선임기자
아침햇발
그는 조용한 중학생이었다. 반장에 운동도 좋아했다. 어느날 그는 학원 쉬는 시간에 한 친구가 하는 이상한 동작에 ‘감전’됐다. 그 친구는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두 발을 가위처럼 엇갈려 한동안 멈춰 있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가르쳐 달라고 달라붙었다. 그땐 그것이 ‘비보잉’(브레이크댄스 동작)인 줄도 몰랐다. 쉬는 시간엔 복도에서, 점심시간엔 교실 한켠에서, 학원에서는 1층 대리석 바닥에서 마음껏 구르고 물구나무서며 춤을 연습했다.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추운 겨운날에는 언 손을 녹여가며 동네 공원의 반들반들한 바닥을 찾아가며, 밤늦은 시간에는 경찰 순찰차를 피해가며 춤을 익혔다.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춤 실력은 늘어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성적이 떨어지는 이유가 ‘춤’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곤 화를 내셨다. 몇차례 부모와 충돌한 그는 일부러 기말시험의 모든 답안을 틀리게 찍어 석차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자식의 ‘반란’에 충격받은 부모와 한바탕하곤 가출했다. 가출 며칠 만에 피시방 아이피를 추적한 아버지께 붙잡혀 귀가했다. 어머님은 더이상 화를 내시지 않았다. “어디든 대학은 나와야 된다”고 조용히 설득하시는 정도였다.

(어, 내 아들과 너무 비슷하다. 중학교 때 반장도 하던 놈은 고1 때 ‘무에타이’(타이 킥복싱)라는 무술에 빠져 공부는 바닥이었다. 혼난 아들은 가출했다. 며칠 뒤 피시방에 있던 아들은 아이피 추적에 꼬리를 잡혀 귀가했다. 놈은 ‘아빠, 무에타이가 너무 재미있어요. 공격과 수비 기술을 배울 때마다 전율이 느껴져요’라고 말했다. 현재 고3인 놈은 결국 운동 특기로 대학 체육학과에 수시합격했다.)

고교 졸업 뒤 대학(방송연예과)에 합격한 그는 결국 국내 최고의 비보이가 됐다. ‘갬블러’라는 크루(팀) 멤버가 된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보이 경연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에 한국 대표로 3년간 연속 출전해 2003년 3위, 2004년 우승, 2005년 3위를 차지했다. 2002년(익스프레션)과 2005년(라스트포원)에도 다른 한국 비보이들이 우승했다. 그들이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유럽 팬들이 태극기를 구해 응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덧 한국의 비보이들이 원조 미국을 밀어내고 세계 지존이 된 것이다.(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춤꾼을 ‘거리의 양아치’ 정도로 무시하며 무관심했다.)

그는 국내 1000여명의 프로 비보이 가운데 한명인 박지훈(23)이다. 180㎝의 비교적 비보이로서는 큰 키에, 70㎏의 날씬한 몸, 영화배우 못잖은 멋진 얼굴. 이미 세계 유명 이동통신회사의 광고모델도 했다. 수많은 청소년 팬들을 이끌고 있는 그는 한달에 20회 이상 각종 공연을 한다. 1년에 10회 이상 국외 공연과 출전을 하고, 2008년 열리는 베이징올림픽의 식전행사에 이미 출연 요청도 받아 놓은 상태다.

지금도 피땀을 흘리며 연습한다. 매일 오후 5시부터 5시간 연습하고, 공연하는 날은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연습한다. “즐거워요. 즐거운 춤으로 먹고살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해요.” 이제야 기성세대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틀’(비보이 경연대회), ‘프리즈’(멈춤 동작), ‘파워 무브’(원심력을 이용한 회전 동작) 등 비보이 용어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그것도 미칠 듯이 즐겁게 몰두하는 세대. 그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며칠 뒤에 있는 아들 놈 무에타이 경기 땐 링사이드에서 응원해야겠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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