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 국내담당 부편집장
편집국에서
전시작전통제권 귀속 문제에 고고한 동양철학자까지 나서서 목소리 높이는 걸 보고 의아스러웠지만, 결국 통합을 위한 갈등이려니 여기고 냉소해선 안 된다고 정리했다. 그러던 차에 한 보수신문에 실린 칼럼을 보고 옛날 추억이 떠올라 이 글을 쓰게 된다. 칼럼을 쓴 분은 1980년대 말 같은 출입처에서 일한 선배였는데, 그는 몇몇 지점에서 나와 생각이 달랐다. 그런데 선배의 이번 글은 나와 비슷한 공감대 속에 있었다. 강남에 살지도 못하고 번듯한 아파트도 없는 보통 가장들로서는 가슴이 꽉 막히겠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는 기성세대라면 “과거와는 달리 잘생긴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게 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 현실”에 대한 걱정에 내남이 없을 것 같다.
17년 전 그 선배와 나는 요즘으로 치면 ‘보수 대 진보’였다. 전교조 문제가 그랬다. 당시 전교협이 교원노조화를 선언하자 교육문제를 다루는 기자들이었던 우리는 전교조가 결코 합법화되지 못할(또는 되어선 안 될) 것과 반드시 합법화될(또는 되어야만 할) 것이라는 쪽으로 갈렸다. 그는 민주화는 바람직한 변화지만 교원노조는 우리 현실과 맞지 않을 뿐더러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나는 헌법이 보장한 교사들의 노동권을 더는 제약할 수 없으며 교사운동은 교육현장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맞섰다. 그후 전교조는 수많은 교사들이 해직당하는 수난 끝에 10년 뒤인 1999년에야 합법화되었다. 그때까지는 선배의 예상이 맞았고, 그 이후부터는 내가 맞은 셈이었다.
교장에게 교복 착용 선택권을 주기로 해 교복 자율화 후퇴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역시 의견이 갈렸다. 나는 교복 자율화는 본질적으로 교복을 입는 주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 교육의 하나이므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성인들에겐 미성년자인 학생들이 샛길로 빠지지 않고 차분히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규율을 가르칠 의무가 있으며, 교복도 그런 교육의 일환이라고 선배는 주장했다. 교복 문제를 민주주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운동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문제는 선배 쪽이 더 현실적합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문민정부 출범으로 사회의 민주화, 자유화가 더욱 진전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부터 오히려 다시 교복 착용이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린 생각은 서로 달랐지만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불필요하게 자극한 일은 없었다. 이념적 성향은 달랐으나 선배와 후배로서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주었던 것 같다. 그동안 변변히 소주 한 잔 나눈 적이 없었지만, 세월이 흘러 우리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중년이 되었다. 그것은 양극화 저지라든가, 교육기회의 확대라든가, 삶의 질의 개선 따위에 모아진다. 기성세대로서 다음 세대에게 느끼는 사회적 책임감도 비슷할 것 같다.
선배님! 생각이 달랐을 때도 길을 찾아왔는데, 하물며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바에야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대한민국을 이만큼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온 것은 갈등과 대립을 거듭하면서도 결국엔 사회적 합의를 찾아간 데 있었던 게 아닌가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좋은 이념, 나쁜 이념이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굳이 가른다면 인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키는 힘은 ‘좋은 이념’이 아니라, ‘좋은 인간’들의 배려와 연대, 선의의 협력과 경쟁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새삼 해봅니다.
이인우 국내담당 부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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