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김선주칼럼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의 관계, 말과 글의 힘과 책임에 대해 깊게 파고든 20세기의 대표적 지성이다. 그는 2차대전이 터졌을 때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진정한 시인이었다면 이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는 또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주고받는 말들, 그것은 대중을 오도하는 말이 되어 비참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독소가 되고 있다. 진정한 시인, 적어도 언어를 특별히 중시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시인은 언어로써 파악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가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모든 글쓰는 사람은 이런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시인이란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성인·언론인 등 말과 글이 직업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시인, 언론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진정한 언론이 있다면 인류 최대의 재앙인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세계의 언론은, 시인은, 지성은, 언어를 특별히 중시하는 직업인으로서, 언어로 파악 가능한 모든 일에 끝까지 책임지려는 의지가 없어졌다.
최근 진중권씨가 공적 글쓰기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또 하나의 담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 동의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어떤 사안에 대해 발전시킬 여지가 많은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사고의 지평을 새로운 방향으로 열어줬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절필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공적인 글쓰기를 절대로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쓰지 않고 있다.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입과 펜에 재갈을 물렸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글쓰기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침묵으로 또는 행간으로 이어져온 공적인 글쓰기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왜 글을 쓰고 글을 읽는가. 소통을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공감을 얻기도 하고, 또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담론을 형성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글쓰기는 내 편과 네 편을 정해놓고 자기 말만 한다. 피차 귀를 막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우리 편 잘한다, 우리 편 잘해라다. 소통이 필요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온몸이 화끈거리게 부끄럽다. 내 편 네 편을 확실히하기 위해 글을 쓰고 읽을 뿐 진정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터넷이 생기고서 공중변소의 낙서가 사라졌다고 한다. 인터넷이란 일종의 배설장소다. 댓글이란 오늘은 이 소리 하고 내일은 저 소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나날의 역사를 쓰는 마당이다. 그런 곳까지 책임지지 못할 말과 안팎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글이 난무한다. 그러다 보니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 두려워 글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생겼다.
어렸을 때 알제리에서, 베트남에서, 칠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세계 지식인들이 하나로 뭉쳐 발언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고 전율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인구가 많고 인터넷으로 소통이 원활한 시대에 소통이 안 되는 불행을 세계적으로 겪고 있다니 끔찍하다. 진정한 언론이 있다면 이라크 침공도 레바논 침공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지식이 내가 사는 오늘 이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고 불후의 역작으로 남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담론이 사라진 시대가 더 절망적으로 불행하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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