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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한비야가 아픈 이유 / 이길우

등록 2006-07-30 18:40수정 2006-07-31 09:18

이길우 선임기자
이길우 선임기자
아침햇발
“나 지금 베이징 기차역이에요.”

여전히 활기찬 목소리였다. 반가운 마음에 만사 제치고 베이징역으로 달려갔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야간 기차를 타고 시안으로 가는 길이란다. 기차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역 안의 한 카페에서 간단히 맥주를 나누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그는 자신보다 갑절쯤 큰 배낭을 등에 멘 채, 또 하나의 보조 배낭을 앞에 메고 낙하하는 특전사 요원처럼 씩씩하게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바람의 딸’ 한비야(48)씨는 기자가 10년 전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그렇게 거침없는 모습으로 대륙에 스며들어갔다. 그 이전 한씨가 홍보회사에 근무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는 북한산 ‘청심환’을 비상약품으로 쓰라고 주었고, 한씨는 중국 내륙에서 배탈이 나 고생하던 아이에게 그 약을 줘 큰 인심을 얻었다고 했다.

자신의 뜨거운 피가 향하는 대로 7년간 세계의 오지를 경험하며 거침없는 삶을 살아온 한씨는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라는 책으로 청소년들에게 넓은 세상을 향하는 꿈을 심어주었다. 5년 전부터는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전쟁과 재난 지역에 뛰어들어가 인류애를 심어주는 일을 하며 또다른 감동을 선사해 왔다. 그런 한씨가 아프다.

지난해 10월부터 어지럼증이 계속되더니 얼굴 한쪽 근육과 손에 마비 증세까지 왔다. 병원에서는 과로에 따른 뇌혈관 장애라는 진단을 내렸고, 한방에서는 정신적으로 충격이 쌓여 생긴 ‘화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한씨는 지금도 이런저런 악몽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란 지진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하다가 건물이 무너져 땅속에 묻혔어요. 살려달라고 소리쳐 구호요원이 다가왔어요. 구호요원이 손을 잡아 끌어내려는 순간, 누군가 밑에서 발목을 잡아 끌어내려요.” “이라크 전쟁에 투입됐는데, 안전요원이 즉시 철수하라는 명령인 ‘코드 블랙’을 외쳤어요. 짐을 챙겨 간신히 사무실을 빠져나오는 순간 시커먼 폭탄이 날아들었어요. 친한 동료의 몸이 두 동강 나는 거예요.”

이런 꿈을 꿀 때마다 한씨는 속옷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린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본 수많은 끔찍한 광경을 괴로운 표정으로 설명한다.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해일(쓰나미) 현장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어요. 하루 수천 구의 사체를 봤어요. 배에 가스가 찬 사체는 끝내 터져 내장이 널브러졌어요.”

한씨는 이 병의 원인이 자신 탓이라고 한다. 구호활동 뒤에는 꼭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디브리핑’(debriefing·복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정신적인 충격을 치유받아야 하는데, 그는 되레 재난지역 청소년들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치유에만 힘썼지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다 이런 일까지 겪게 된 것이다.

“쓰나미에 자신이 붙잡고 있던 여동생을 놓쳐버린 8살 난 인도네시아 소년에게 ‘그 파도는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엄청난 자연재해야. 동생이 죽은 것은 결코 네 탓이 아니야’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디브리핑 과정에서 환자의 상태가 심각할 경우 의사는 일정 기간 모든 구호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할 정도로 이 치료 과정은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곤경에 빠진 타인의 삶을 구원해온 한씨가 하루속히 회복돼 오늘도 불타고 있는 베이루트 폭격 피해자들 곁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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