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우 선임기자
아침햇발
어린 육상선수가 스타디움 벽을 보고 누가 볼세라 조용히 울고 있다. 한동안 어깨를 들썩거리다 눈물을 훔치고 동료선수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인다.
10대 꿈나무들이 참가하는 육상선수권대회 결승선 부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목표로 세운 기록에 못미치거나 입상을 못해 우는 것일 게다. 한 육상지도자는 “저렇게 우는 선수가 다음 대회에는 꼭 입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주말마다 열리는 일반인(마스터즈) 마라톤대회 결승선 부근에서는 어른들의 울음도 볼 수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온 40~50대 가장은 기다리던 가족들의 품에 쓰러져 진하게 울곤 한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목표’에 마침내 다가섰다는 성취감이 감정의 통제선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것이다. 코끝이 찡한 감동이 모두를 사로잡는다. 일년에 벌어지는 크고작은 마라톤대회가 무려 250여개, 마라톤 인구가 400만명으로 추산될 만큼 한국은 ‘마스터즈 마라톤 왕국’이다.
그러나 엘리트 마라톤 기록은 뒷걸음질이다. 한때 세계적 마라톤 강국이던 한국은 이제 국제무대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지난해 국내 엘리트 마라톤 선수가 세운 최고 기록은 2시간12분대다. 한 명도 2시간10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세계기록인 2시간4분55초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세계대회에서 한국의 우승은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라톤뿐 아니다. 단거리, 중거리 등 트랙과 필드 경기의 대부분 기록은 10~20년째 묵은 숫자다. 현재 육상 전종목에서 아시아기록 보유자가 한 명도 없을 뿐아니라 지난 10년간 한번도 아시아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마스터즈와 꿈나무들의 육상에 대한 열정은 뜨겁기만 한데, 왜 스포츠의 기본인 육상은 퇴보하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전국체전’ 때문이다.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전국체전은 기록에 관계없이 순위에 따라 점수를 매기기 때문에 선수들은 기록 단축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난해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전 남자 대학부 1만m에서는 선수들이 마치 연습하듯 뛰다가 막판 한두바퀴에서만 순위다툼을 했다. 1등이 31분30초13으로 최고기록(28분30초54)에 한참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육상 관계자들은 선수들을 질타하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선수들이 전국 70여개 시군청 소속인 것도 기록 퇴보와 직결된다. 1년에 한번 전국체전에서 중위권 정도로만 뛰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자치단체에서도 소속선수가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부분 여름에 열리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가을 전국체전 기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대회에 출전하더라도 메달권과 멀어 홍보효과가 없다. 그러기에 소속팀에서도 ‘그까이꺼 대충’ 일년에 전국체전을 앞둔 두달 정도만 운동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기업 육상팀인 삼성전자와 코오롱 팀에 소속된 선수들도 훈련이 심하지 않는 시군청팀으로 옮긴다. 최고 엘리트 선수들의 ‘하방’은 곧 기록의 하향평준화로 연결된다. 삼성전자의 경우 한때 30명이던 선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코오롱은 여자팀의 경우 선수가 모두 시군청팀으로 빠져나갔다. 심하게는 1~2년 만에 소속팀을 옮기는 이른바 ‘메뚜기선수’가 되어 기록보다 잿밥(계약금)만 챙기는 얌체족으로 변신하는 선수들도 출현한다.
개선책은 없나? 우선, 전국체전에서 순위보다도 기록에 더 높은 가산점을 주는 일부터 시작하자. 기록 경신 없는 달리기나 던지기는 더는 육상경기가 아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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