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해녀는 옛 문헌에 ‘잠녀, 좀녀, 잠수’ 등으로 나타난다. 일제가 이들을 낮춰 해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논란 때문인지, 제주 사람들은 여전히 옛 호칭을 선호한다. 오랜 기간 이들은 맨손과 맨발로 해산물을 채취했다. 이런 나잠(裸潛)은 제주와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작업방식이다. 현대적 잠수복이 나오기 전까지, 손수 만든 물적삼(상의)과 물소중이(하의)를 걸쳤다.
해녀는 척박한 땅과 바다를 일군 경제활동의 주역이었다. 밭일을 하다가도 물때가 되면 바다로 향했다. 제주 인근뿐 아니라 육지 근처까지 원정을 가거나, 뱃일 등 바깥물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잠년 아기 나 뼴 사을이민 물에 든다”(해녀는 아기낳고 사흘이면 바다에 들어간다)는 속담에는 이들의 억척스럽고 고단한 일상이 묻어 있다.
해녀의 삶은 민중 수탈의 역사이기도 하다. 조선 때는 귀한 해산물을 진상하라는 관리들의 폭정 탓에 섬을 떠나기까지 했고, 일제 때는 수탈 기구로 전락한 해녀조합의 폭리에 시달렸다. 1930년대 성산포 사건 등 ‘해녀 항쟁’은 착취에 맞서 어민으로서 떨쳐 일어난 항일운동이었다. ‘배움 없는 해녀 가는 곳마다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강관순은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를 지어 부르며 분노를 삼켰다.
한때 1만명을 웃돌던 해녀가 사라지고 있다. 현직은 대부분 고령이고, 대를 이어 물질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해녀들이 물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의지하던 뒤웅박(테왁)과 조개류를 잘 딸 수 있게 단단하게 만든 무쇠칼(비창)도 얼마 뒤면 박물관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마침 뜻있는 이들 사이에 제주 해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다만 박제용 관광상품이 되지 않으려면 해녀의 삶과 문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평가가 우선이 아닌가 싶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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