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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정책 판단’은 심판할 수 없는가 / 김회승

등록 2006-04-20 18:55

김회승 논설위원
김회승 논설위원
아침햇발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건 아니다.”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법정에 선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1심 최후진술에서 ‘계백장군론’을 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부실을 정책 책임자 탓으로 돌리는 건, 마치 계백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는 논리와 같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흑자도산한 이들한테는 고통과 희생의 대가가 필요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으니 정책 판단이 도마에 올랐고, 국민적 분노는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 국회 청문회로 이어지는 한풀이를 했다.

국가부도 사태를 부른 장본인 색출 작업, 이른바 ‘환란 재판’은 결국 무죄 판결이 났다. 이때 굳어진 판례가 정책적 판단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최대 수혜자는 관료들이다. 수십조원대의 공적자금 비리와 카드대란의 책임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명백한 고의나 중대한 실수가 없는’ 정책 책임자들은 면죄부를 받았다. 정부의 판단 잘못과 관리 소홀로 공적자금 12조원이 새나갔지만, 감사원은 “긴박한 상황의 정책 판단을 문책하긴 어렵다”고 했다.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을 넘어섰을 때도 그랬다. 금융당국의 뒷북 정책이 논란이었는데, 법률 제정과 감독의 비효율적인 구조가 문제라고 결론 지었다. 실체가 없는 시스템 탓으로만 돌리기가 민망했는지 민간인인 금융감독원 간부 한 명을 문책했다. 공적자금 비리는 돈을 떼먹은 기업주한테 여론의 화살을 돌렸고, 카드대란은 신용불량자라는 말 자체를 없애는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린 셈이다.

최근 감사원과 검찰이 조사중인 외환은행 불법매각 의혹도 비슷하다. 일이 터지면 여론이 끓고 감사원이나 검찰이 나서는 모양새는 예전과 다를 바 없다. 현재로선 자기자본비율 조작 등 명백한 불법행위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왜 무리하게 팔았느냐’는 정책 판단에 대한 공방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정책 판단의 조건은 이전과는 조금, 아니 상당히 달라졌다. 경제관료들은 국내외 자본을 상대로 기업구조조정 시장의 어엿한 주인 노릇을 한다. 외환위기 때 달러를 구걸하던 ‘을’의 처지가 ‘갑’으로 바뀌었다. 어떤 물건을 얼마에 어떻게 팔 것이냐는 ‘정책적 판단’은 이들의 몫이다.

현직에서 물러난다고 절치부심할 필요도 없다. 각종 법무·회계법인, 구조조정회사와 컨설팅업체 등 거대한 ‘금융 카르텔’에서 전직 관료는 상한가다. 여차하면 대기업이나 로펌에 가고, 그도 아니면 직접 펀드를 만들기도 한다. 전직 경제관료가 만든 펀드에는 시중은행들이 앞다퉈 돈을 맡긴다. 그 복잡하면서도 공고한 카르텔 내부의 뒤섞임을 보면 누가 전직이고 현직인지, 누가 관료이고 시장 참가자인지 헷갈린다.

김인호 전 수석은 “비록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외환위기 당시 핵심 책임자로서의 도의적 책임은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외환위기와 같은 무게를 다룰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경제관료들은 늘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관(官)은 치(治)한다’며 권한을 행사하지만, 어떤 때는 불확실하고 긴박한 시장 상황에 책임을 미룬다. 때문에 그들의 정책적 판단에는 실수나 오류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정책의 결과가 좋으냐 나쁘냐는 결과적 해석일 뿐이다. 법적 단죄는 피할지 모르나 정치적·역사적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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