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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밀항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 [크리틱]

등록 2024-01-03 14:52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컷. 판씨네마㈜ 제공

 

권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동아시아 최고 시인 중 한명”(오세종)으로 평가받는 김시종(1929~)의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에서 가장 생생하고 먹먹한 대목은 청년시절 제주 4·3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수배와 도피를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는 장면이다. 당시 시인은 “이것은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을 들으며 목숨을 건 밀항길에 나선다.

그런 김시종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던지, 지난 12월 말 시인이 밀항선을 타고 도착했다고 추정되는 고베 인근 스마와 마이코 해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천천히 걸으면서 도착 당시 그의 내면, 그 불안과 설렘을 헤아려 보았다. 그는 해안가 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사카 쓰루하시로 가 조선인 마을 이카이노에 정착한다. 시인은 제주에서 헤어진 부모님을 평생 만나지 못한다. 밀항한 지 49년 만인 1998년에야 비로소 고향 제주로 돌아와 부모님 묘소에 절하고 소리 높여 우는 운명에 처한다.

고베지역을 둘러본 다음 날 교토로 이동했다. 교토는 지난 12월18일 타계한 재일 한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를 애도하는 심정으로 교토의 거리와 골목을 거닐었다. 나를 교토로 이끈 또 하나의 힘은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의 잔잔하고 담담한 여운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화자(차미경 분)는 일본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 태어나 교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쩌다 보니 그녀는 엄마를 일본에 둔 채, 아빠와 야밤에 밀항선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김시종 시인과는 반대의 이동인 셈이다. 결혼해 부산 영도에서 가정을 꾸린 그녀는 남편을 먼저 잃고 세 딸을 혼자 키우는 기구한 형편에 놓인다. 가끔 편지로 소식을 전하던 엄마는 교토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뜬다. 한국으로 온 이후 엄마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뒤늦게 딸들 앞에서 “엄마, 교토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화자, 마침내 교토 병원을 나오는 길에 “오까상”(엄마)을 외치는 화자의 애절한 목소리는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또 다른 시선의 가슴 시린 디아스포라 스토리다.

이 책과 영화에는 밀항과 이산으로 인한 부모(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이 유사하게 등장한다. 편지나 인편을 통해 가족의 소식이 전해지지만, 이들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밀항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온 땅에서 모든 걸 포기한 사람들의 인생을 건 마지막 선택이자 도박이었다. 이 땅의 예술에서 충분히 형상화되지 못했던 숱한 밀항의 사연과 운명, 그토록 치명적인 슬픔과 회한을 담은 스토리가 이제 조금씩 세상에 드러난다. 죽음과도 같은 고독과 공포 속에서 컴컴한 바다를 건넜던 밀항자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험난하기만 했던 한국 현대사와 그 어려운 한일관계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리라.

‘조선과 일본에 살다’(2016)가 현재 절판 상태라는 점, 12월6일 개봉해 아직 상영 중인 ‘교토에서 온 편지’ 관객수가 2일 현재 6762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한국의 출판과 영화에 얼마나 쏠림 현상이 심하며 의미 깊은 작품이 충분히 관심받지 못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퇴행의 시대지만, 작가의 인생과 열정을 건 양질의 작품이 그 가치만큼 눈 밝은 독자와 관객에게 온전히 다가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라도 없다면 얼마나 쓸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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