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어느덧 연말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깐이나마 숨을 고르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려 노력하는 시기다. 동시에 새해 계획을 세우는 때이기도 하다. 무엇을 그대로 이어갈 것인지, 혹은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자문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국 정치의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금세 암울해진다. 총체적 퇴행이 그대로 이어질까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상태로 한 해를 마감해도 괜찮을까?
총선을 앞두고 민생 의제는 사라지고 거대 양당은 그저 수지타산을 맞추느라 분주하다. 국민의힘은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기술자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뚜렷한 비전과 철학도 없으면서 아예 대놓고 얕은 수싸움을 하느라 정신없다고 자백하는 꼴이다. 이해관계 앞에서 대의와 원칙을 버려도 괜찮다고, 지난 과오를 알면서 되풀이해도 괜찮다고 공언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의 정치는 한철 장사인가? 기득권을 지키려 약속을 뒤집는 정당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미래를 구상할 능력과 의지는 있을까? 민주당의 각종 공식 발표를 귀 기울여 들어보아도, 거기에는 윤석열-김건희 비판 이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핵심 철학이 무엇인지, 구체적 비전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요즘 시대에 윤석열-김건희 비판은 정치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하고 있다.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대안을 마련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정치인이다. 내용 없는 반윤석열 정치의 공허함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반대와 타도에 집중하다 자기 내용을 상실한 정당은 그저 ‘대립항’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머릿수만 보면 거대 정당인데 현 국면에서 반사이익도 챙겨 가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민주당은 대립항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더 똑똑한 제3의 세력이 나오면 그만 아닌가? 그것이 정당이든 사회운동이든, 거대한 무당층은 어디로든 뛰어들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열망을 반영하듯 새롭게 꿈틀대는 세력들이 계속해서 고개를 내밀 것이다.
관성에 빠진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람들은 적대와 조롱에 올라타는 손쉬운 ‘윤석열 반대’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원형을 보여주는 세력을 갈망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현 정부의 실정을 폭로하는 정치, 삶을 혁신할 수 있는 정책을 설명함으로써 지금의 정책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정치,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로드맵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사회가 실로 불공정했음을 증명하는 정치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폭정을 제대로 공격하는 정치다.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대립항의 정치가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전망의 정치를 해내야 한다.
모두가 위기와 재난을 논하면서 발본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작 정치권은 능동적 전망의 정치를 해낼 사람을 찾지도 키우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치와 정책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윤심 경쟁’과 ‘이재명 지키기’에 급급하니 차분히 비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가 없지 않겠나? 오히려 역량 있는 구성원들마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조다. 변혁적 리더십 이론은 ‘지금-여기에 주력하며 가시적 성과에 집중하는 사람’은 매니저, ‘중장기적 비전과 미래 가치를 제시하는 사람’은 리더로 구별한다. 물론 단기적 이익에 빠르게 응대하는 매니저도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정치에서 리더는 누구인가? 비전과 가치를 몸소 보여주고, 국민에게 믿음을 주며, 구성원들의
정치적 역량을 증진하는 리더가 있는가.
기득권 수호와 조직 보위를 최우선으로 삼는 정치는 필요 없다. 우리는 가치와 비전이 담겨 있는 ‘내용 있는’ 정치를 원한다. 나와 생각이 달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검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진중한 담론을 만들어달라는 얘기다. 우리 삶의 안녕을 반영하는 지표들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다음 세대는 태어나지 않고 있으며, 전지구적 재난에 온 힘을 다해 대응해도 모자라는데, 교착상태에 빠진 양당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2024년을 맞아 새해 소원을 빈다는 핑계로 새로운 정치를 갈망해본다. 새해에는 제발 정치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