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 전국여성노동조합 등 시민단체들이 지난달 23일 경기 성남시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게임업계의 사상 검증을 비판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제공
한국의 세계 게임 시장 점유율은 7.6%(2021년 매출액 기준)다. 미국(22%), 중국(20.4%), 일본(10.3%)에 이은 네번째다. 정부는 올해 1월 발행한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서 “한국이 세계 4위 규모의 게임 강국으로서 입지를 다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게임 업계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사상 검증’을 생각하면 ‘게임 강국’이라는 말이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인다. 사상 검증은 반페미니즘 정서가 깊은 ‘남초’ 사이트 이용자들이 게임 제작에 참여한 노동자(특히 여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찾아낸 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활동을 색출해 비난하고, 피해자를 옹호하는 사람(특히 여성)까지 괴롭히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2016년 7월 넥슨이 게임 ‘클로저스’의 캐릭터 목소리를 맡은 성우를 교체(계약 해지)한 사건은 사상 검증의 시발점이다. 일부 게임 이용자들은 그 성우가 “여자들은 왕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의 영어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 사진을 에스엔에스에 올렸다는 이유로 교체를 요구했고, 넥슨은 이를 수용했다.
그로부터 7년, 사상 검증 이슈는 현재 진행형이다. 또다시 넥슨은 지난달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 속 여성 캐릭터가 0.1초 동안 보인 손동작을 두고 일부 게임 이용자들이 ‘남성 혐오’라며 항의하자,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해당 홍보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반페미니즘 집단의 사상 검증 공격은 젠더 기반 폭력(여성에게 신체적·성적·심리적 피해를 초래하거나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폭력) 양상을 띤다. 게임 업계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개발자 등으로 일하는 여성 창작 노동자를 집중 공격한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위협받는다. 게임 ‘림버스 컴퍼니’를 개발한 회사 ‘프로젝트 문’은 지난 7월 게임 개발에 참여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과거 에스엔에스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게임 속 여성 캐릭터 신체 노출이 적다는 남성들의 항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가해자는 게임 회사 안에도 존재한다. 최근 기자가 인터뷰한 게임 업계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 내에서도 사상 검증과 맥을 같이하는 여성 혐오와 차별을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한 게임사 여성 개발자는 “지난달 넥슨 사태 이후 칸막이 너머에 있는 다른 팀 사람들이 ‘우리 팀엔 페미×들 없겠지?’, ‘있으면 잘려야지’ 등의 말을 세 차례 이상 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게임사 신규 채용 면접을 봤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는 “회사 대표가 최종 면접 때 제 에스엔에스 활동을 언급하며 ‘향후 문제가 되면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사상 검증 문제의 원인을 반페미니즘 집단에서 찾지 않고 여성 개인에게서 찾는 꼴이다.
여성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일을 그저 ‘놀이’로 소비하는 남성들, 이들이 부리는 생떼를 ‘고객의 정당한 요구’로 간주해 여성 혐오와 차별에 동참한 게임 회사, 그리고 이를 방치하는 정부와 국회 모두 사상 검증 가해자다. 10년 넘게 게임 회사를 다녔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는 해마다 반복되는 사상 검증 문제를 보며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달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이 게임 업계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사상 검증 질주를 끝내기 위해 ‘게임 강국’ 한국에 지금 필요한 건 성장이 아니라 성평등이다.
오세진 젠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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