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건조 공정 가운데 하나인 (블록)대조립 작업장에서 용접하는 노동자. 필자 제공
이태현 |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선전편집실장
우리나라 조선사들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건조 기술력은 워낙 뛰어나 전세계 발주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다. 환경 규제에 맞춰 친환경 연료 추진선으로 교체하는 추세인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엘엔지 해상운송 수요가 늘면서 전세계 엘엔지 운반선 발주량이 크게 늘었다. ‘신조선 발주 붐’에 웃음꽃을 피울 것 같지만, 현장 상황은 그렇지 않다. 조선업종은 노동강도에 견줘 임금이 형편없이 낮기에 일감은 가득 찼지만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 들어와도 노 저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되니, 조선소들은 타이, 중국,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에서 E-7(일반기능인력)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에서는 갑작스레 늘어난 이주노동자들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활동해 나갈지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이주노동자 보호를 위한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어느 저녁 퇴근 무렵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가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중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났는데, 이주노동자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사고 조사와 후속처리를 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조선소라는 위험한 공간에서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것인가. 이런 비슷한 일이 몇 차례 있고 나서야, 회사는 외국인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외국어대 졸업생을 인턴으로 채용해 통역 업무를 맡겼다. 이제 생산 현장에서 교육 등 소통이 필요할 때면 지원센터에 요청해 통역사를 부른다.
지난 7월에는 타이 출신 한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방문했다. 번역기를 써가며 그가 한 말은 “여권을 찾아달라”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현지 송출업체와 계약할 때 ‘고용주가 여권을 보관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이탈을 막으려고 여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인권침해이자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다. 노동조합은 조합 소식지에 이를 알리면서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를 멈추라고 이주노동자들의 법적 고용주인 하청업체 업주들에게 경고했다.
올해 조선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는 5470명으로 지난해(1017명)보다 5배 이상 늘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300만원가량(세금 공제 전)이다. 전문기능을 가진 이주노동자에게 발급하는 E-7 비자는 임금 하한선이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의 80%(월 280만원) 아래로 급여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부는 이 기준을 중소·중견기업에 한해 70%로 낮췄다. 올해 최저시급(9620원)으로 월 소정근로시간(209시간)을 일하면 200만원 언저리인데, 별도 수당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초과근무 수당으로 100만원가량을 채운다.
금속노조가 실태조사에 나서 이주노동자 410명을 설문조사하고 22명을 심층인터뷰했다. 타이에서 온 용접공에게 근무시간표를 적어달라고 하니, 평일 절반은 밤 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오전 8시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있었다. 주 77시간 노동에, 한달에 쉬는 날은 3~4일에 불과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브로커에게 준 수수료 빚을 갚고 가족들에게 송금한다.
조선소 일거리는 내년이 더 많다.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시급과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활동가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현장에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없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불성실하거나, 노동조합 활동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 계약을 거절당할 수 있다. 부당한 현실을, 노동법 조항을 알아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노동청에 법정 근로시간 초과 등을 신고해볼까. 하청업체 사장은 벌금을 내고서라도 이주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겠다고 한다. 원청으로부터 도급받은 물량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벌금 납부보다 더 곤란한 일이 생긴단다.
금속노조와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조선산업 종사자 차별 처우 금지, 표준계약서 사용 의무화 등 법과 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선산업 기본법’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기업이 불법을 저지르고 정부가 눈감아주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