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중산층’과 일반 중산층이 바라는 정책은 세금, 부동산 정책, 의료·사회 보장, 교육 부문에 걸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2023년 6월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토지거래허가제 폐지를 촉구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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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직장생활에서 얻은 일과 관련된 여러 소중한 경험과 지혜, 또 숙련·지식을 기반으로 가족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수많은 사람의 일자리와 소득에 기여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민간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조직에서 퇴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간혹 짧게 건네는 말이다. 그런데 구해근 교수(미국 하와이대학·사회학)가 최근 국내에서 한 대중 강연(‘한국 특권 중산층’ 진단)을 보며 사뭇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구 교수는 민간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 등을 신흥 고소득층으로 분류하고 이들과 여러 전문직 고소득자 부류를 합쳐 ‘특권 중산층’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질주의적이고 가족이기주의적인 행동, 세속적 기회주의를 그 특징으로 규정했다.
신흥 부유 중산층의 부상으로 한국 중산층은 이제 경제적 위치나 계급적 이해에서 크게 차이 나는 두 계층집단으로 ‘내부 분화’하고 있다. 과시적 소비를 통한 신분 경쟁, 서울 강남을 위시한 부동산과 주거지의 계층적 분리, 치열한 자녀 교육 경쟁 같은 ‘특권’에 기반을 두는 사람이 선호하는 경제정책과 일반 중산층이 바라는 정책은 세금, 부동산, 의료·사회보장, 교육 부문에 걸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주택 자산소득과 금융대출 영역만 봐도, 2010년대 이래 몇 차례 찾아온 부동산시장 거품은 수많은 사람의 예금으로 만들어진 사회공동체 자원(은행 대출)을 최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자금동원력을 가진 대기업·공공부문 임원에게 큰 돈벌이 기회를 제공했다. 이들은 각종 직간접적이고 미시·거시적 향후 아파트가격 정보도 다른 사람들보다 비대칭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는 저서 <파워 엘리트>(1956)에서 “엘리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적·심리적 실체로서 스스로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자각하며 행동과 사고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고 묘사했다.
요즘의 ‘특권 중산층’ 논의는 중산층에서 하위계층으로 추락하는 많은 열패자의 문제 못지않게 이제 한국 사회경제 정책과 제도·구조를 기반으로 승자로 떠오른 신상류 중산층의 행태를 새롭게 진단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중산층 기준은 소득·주거·여행·외식 등에서 개인의 주관적 체감 정도를 측정하는 방식도 있고, ‘사회 중위소득의 50~150% 혹은 75~200% 계층’처럼 객관적 정의도 있다. 통계청의 ‘2023년 사회조사’(5월 전국 1만9천 개 표본가구에 상주하는 13살 이상 가구원 3만6천 명 조사)에서 19살 이상 인구 중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 ‘중’ ‘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각각 35.4%, 61.6%, 3.0%였다. 2013년(하·중·상 각각 40.7%, 57.4%, 1.9%)에 견줘 ‘하’는 확연히 줄고, ‘중’과 ‘상’은 두터워졌다. 특히 ‘본인 세대의 계층 상승 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013년 31.2%에서 2023년 26.4%로 낮아졌고, ‘자녀 세대의 계층 상승 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는 비중은 이 기간에 39.6%에서 29.1%로 대추락했다. 자녀가 부모 세대보다 더 후퇴한 사회경제적 생애를 보낼 것이라고 걱정하는 셈이다.
물론 대기업과 공직에서 임원·고위직으로 퇴직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직업세계에서 30여 년간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쏟았을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 행운, 나아가 사회경제적 질서·구조가 제공한 어떤 혜택 역시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분명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두 세계’(밝고 평화로운 가족 세계와 그 바깥의 어둡고 거친 세상)가 내게 떠오른 건 어떤 까닭일까?
<한겨레> 선임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