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제1세션 직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길윤형ㅣ 국제부장
“한-중 회담 합니까?”
슬슬 마감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던 17일(한국시각) 오후 3시50분께, 이따금 만나 서로 속내를 터놓곤 하던 일본인 기자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따로 만나느냐는 질문이었다.
‘글쎄, 만날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보다 4시간쯤 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진행 중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지 브리핑에서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는 “일정이 지금 빡빡”하다는 핑계를 대며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만, 논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담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샌프란시스코 출발 직전 회담 성사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궁색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이번 아펙 정상회의에서 한·중 정상이 잠깐이라도 마주 앉아 양국 현안을 점검하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회담 성사를 위해 끝까지 노심초사했을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터이기에 긴말은 삼가려 한다. 다만, 현재 한국 외교가 실로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점만은 강조해두고 싶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윤석열 외교’는 ‘애니싱 벗 문재인’(anything but Moon·ABM)이란 말로 짧게 줄일 수 있다. 전임 문재인 정부가 한-일 관계를 망쳐놨으니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본과 관계를 회복했고, 대중 ‘3불 정책’이 외교 주권을 제약하는 것이니 이를 무력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 화룡점정은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나온 3개 문서를 통해 한·미·일은 사실상 군사동맹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딘다.
하지만 윤 정부가 열심히 문재인 지우기에 몰두하던 3~4월께부터 이와 결이 다른 움직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디커플링’(탈동조화)과 ‘디리스킹’(위험완화) 논쟁이었다. 디커플링이 중국과 관계 단절론이라면, 중국이 남중국해·동중국해(대만) 등에서 보이는 강권적 움직임이나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위압’에는 반대하지만, 세계 2위의 경제를 가진 중국과 척지고 살 순 없다는 게 디리스킹 주장이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지난 3월 말 이 말을 처음 꺼내 든 뒤 미국이 이를 전면 수용했고,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미·중 정상은 15일 양국 간 여러 이견에도 관계를 안정시켜가기로 합의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감을 잡고 날카롭게 움직인 이들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쿼드’, ‘오커스’에 참여하며 대중 봉쇄의 선두에 섰던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아펙 회의 전인 6일 베이징에서 시 주석과 만나 “중국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라며 양국 관계를 극적으로 개선시켰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역시 17일 무려 65분이나 시 주석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양국 간 현안에 관해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 시 주석 일정이 빠듯했다지만, 미국(4시간), 일본(65분) 외에 브루나이·피지·페루·멕시코 정상과 회담에 나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일과 소통하면 그뿐, 한국은 따로 만나볼 필요 없는 ‘하위 변수’로 취급당했다는 ‘더러운 뒷맛’이 남는다.
그렇다면 미·일과 관계는 탄탄해졌는가. 윤 대통령의 지난 3월 대일 양보안은 이미 국내적으로는 파탄에 이르렀다. 법원이 공탁금을 수리하지 않고 있기에 일본이 ‘빈 컵의 반’을 채우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면, 언젠가 ‘부분적 현금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때도 일본이 윤 대통령의 사정을 봐줄 것인가. 내년 11월 미 대선의 향방은 오리무중이고, 핵을 가진 북한과 러시아는 굳게 결속해 한국을 노려보고 있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미국은 ‘경쟁이 갈등으로 번지지 않게 하자’고 말했고, 일본은 ‘양국 간 전략적 호혜관계를 유지하자’고 호소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한국이 바쁜 시 주석의 소매를 잡고 꼭 해야 할 말은 무엇이었을까. 말은 철학에서 나오고 철학은 상대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윤 대통령에겐 무리한 주문일지 모르겠지만, 성난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유연하고 강인하며 철학이 있는 외교를 보고 싶다.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