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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국가는 진심으로 인권 의무를 다하라

등록 2023-11-19 18:51수정 2023-11-19 19:27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 제공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 제공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지난 10월 말, 나는 제네바에 있었다.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 규약) 국가보고서 심의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자유권 규약은 1966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체결되었으며,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과 함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국제인권조약으로 불린다. 우리나라는 1990년 자유권 규약의 가입국이 되었고, 이 규약은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 따라 국내법의 효력을 가진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인권 보장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치이자 의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러한 공감대 위에서 인권이라는 보편적 권리를 선언하고 인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는 국제인권조약들이 체결·발효되었다. 특히 ‘자유권 규약’은 가입 당사국이 100개가 넘는 거대한 다자조약이다. 이상적으로야 전세계의 국가들이 공통된 조약상 의무를 부담함으로써 그 국가에 거주하거나 속한 사람들은 조약상 권리를 실효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조약 이행을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국제인권조약의 공허함이 지적된다. 국내법의 경우 그 이행을 국가가 강제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범죄를 저지르면 처벌받고, 계약을 불이행할 경우 그에 따른 손해 등을 배상할 사법상의 책임을 부담하게 된다) 실효성이 보장되지만, 조약 당사국들이 조약상의 인권 보장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에는 누구도 그 국가를 처벌하거나 손해배상 등을 명령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다자조약을 기반으로 한 국제인권규범 체계를 설계한 이들이 국제인권규범 체계의 한계를 모를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약 당사국들이 최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여 ‘모든 사람들의 인권이 실효적으로 보장받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절차를 추가했다. 대표적인 절차 중 하나가 이번에 참관한 조약상의 의무 이행 검토 및 심의 절차다. 자유권 규약을 예로 들자면, 국가는 자유권위원회에 조약의 일반적 이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자유권위원회는 국가에 자유권 이행 상황을 심의할 특정 쟁점들을 보낸다. 국가는 그 쟁점들에 대한 조약 이행 상황을 구체적으로 답변한다. 자유권위원회는 국가의 답변서를 토대로 국가가 자유권 규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심사하고 국가에 평가 및 조약 이행을 위한 과제들을 공개적으로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권위원회가 오로지 국가의 말만 듣고 조약의 이행 상황을 점검한다면 실질적인 심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는 조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상황을 최대한 숨기고 이행된 부분만을 최대한 부각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약 기구는 국가의 의견 외에 두 주체의 의견을 추가로 듣는다. 하나는 국가 안에서 정부와 독립하여 인권 의무를 수행하는 인권기구(우리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엔지오(NGO, 비정부단체)의 의견이다. 자유권위원회가 국내 실정을 자세히 실사하지는 않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눈먼 심사가 될 조약 심의를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심사로 만들기 위해 고안해낸 절차들이다. 이번 자유권 심의를 참관하면서도 국가인권위원회와 엔지오의 보고 및 의견 제시 절차를 간접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자유권 위원들의 방대한 질문에 대해 차분히, 순차적으로 대부분의 답변을 해낸 정부대표단, 정부대표단 답변의 이면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실효적인 자유권 규약 이행의 필요성을 마지막까지 강조한 엔지오, 정부대표단과는 독립적으로 대한민국의 인권 의무 이행 실태를 판단하여 보고한 국가인권위원회, 시종일관 ‘대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실질적인 인권 개선을 위한 심의를 시도하는 자유권 위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물가 비싼 제네바에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몇날 며칠을 꼬박 매달리는 이 절차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공허할 수도 있는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고서도 끝내 만들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유지해내고 있는 국제인권규범 체계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재차 질문하면, 결국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라는 뻔한 답이 나온다.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라면 한 국가 내의 경험과 고찰보다는 전세계의 경험과 고찰을 받아들이는 것이 효율적이다.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라면 강제력이 없더라도 실질적으로 따르고 구현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 아래 조약 가입 당사국들이 강제력 유무와 관계없이 진정한 인권 선진국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에 국제인권규범은 공허함 대신 실효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말해도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문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힘으로만 강제해서는 문명을 이룰 수 없다. 법도 마찬가지다. 강제력만을 강조해서 존속되는 법은 응징과 탈법만을 만들어내다가 전복된다. 사람들이 필요성을 느끼고 지켜나갈 때 법은 실효성을 얻는다. 우리나라도 국제인권조약에 가입한 이상 국내법의 효력을 갖는 조약상 의무 이행에 진심을 다하길 바란다.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처벌을 받진 않겠지만 조약의 목표는 우리 공동체의 목표와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제대로 가길 바란다. 이를 위하여 국제인권규범의 관점에서 정부와 독립하여 국가의 인권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제인권규범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취지에 맞게 굳건히 서길 우선적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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