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밤 이태원역 1번 출구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입구에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시민들이 가져온 꽃과 술 등이 놓여있다. 김영희 기자
김영희 | 편집인
이태원 참사 1년을 돌아볼 때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날, 기자들 앞에 유가족들이 서자 극우 유튜버를 비롯한 이들이 노래와 야유를 시작했다.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발언을 멈춘 채 먹먹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분노를 참을 수 있는지 나로선 가늠조차 힘든 당시 심경을 얼마 전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 아주 담담했어요. 원망이나 분노 같은 걸 넘어 이제까지 우리가 한 게 뭔가 같은 참담함뿐이었으니까. 저리 조롱하는 이들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게 한심하고 답답했습니다.”
1년 전 그날, 이정민씨의 딸 주영씨는 약혼자 서병우씨와 웨딩플래너를 만나고 저녁을 먹으러 이태원을 찾았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9월 부부가 됐을 그들이다. 몇달 전 시작한 인스타그램에 병우씨는 매일 주영씨와 찍은 사진을 하나씩 올린다. 자신만의 애도 공간일 것이다. “걱정은 언젠가 주영이 사진, 주영이랑 찍은 사진이 다 떨어질 텐데 그러면 뭘 올려야 할지….” 최근 출간된 청년 생존자와 유가족 증언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1년이 지나도록 이들이 상실과 아픔을 달랠 곳 하나 제대로 없다는 사실이 새삼 사무쳤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포털들이 관련 기사에 며칠간 댓글창을 닫았지만 홈페이지에 댓글창을 그대로 둔 언론사도 있었다. 지난 주말 읽은 한 일간지의 유가족들 관련 기사도 그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추모하세요. 여론몰이하지 말고’ ‘시위꾼들이 유족 사칭해서 쇼하는 건 아님?’ 같은 댓글은 양반인 편, 차마 옮길 수 없는 내용이 다수였다. 유가족과 생존자, 목격자들이 내내 겪었을 일이다. ‘아이들이 놀러 갔다가 마약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바로잡고자 댓글을 달았다가 2차 가해 댓글들을 접했던 생존자 이재현군은 지난해 12월, 159번째 희생자가 됐다. 뉴스타파 분석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관련 기사 5만4천건의 댓글 230만건 가운데 30%가 심한 정도의 혐오표현과 욕설이었고 지금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 입구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안내하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어쩌다 우리는 온전한 애도조차 못 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가.
‘세월호 학습효과’라는 이들이 많다. 당시엔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그래도 한동안 지속됐다. 이태원은 초기부터 달랐다. ‘재난의 정치화’란 말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구실이 됐다. 1주기 추모대회를 ‘정치집회’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을 거부한 것은 이 나라의 지도자가 앞장서 그런 낙인을 찍고 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세월호 1주기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외국으로 떠나기 전 팽목항이라도 갔고, 이완구 국무총리는 안산분향소를 예고 없이 찾았다가 쫓겨나기라도 했다.
‘쇼하기’를 싫어하는 정권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념이나 정치적 계산을 떠나 이 정권의 리더십엔 애당초 따뜻한 심장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뉴스타파의 최근 이태원 1주기 영상 인터뷰에 응한 한 생존자는 울음을 참으며 “제가 빨갱이예요?”라고 되물었다. 피해자들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인가, 거기에 사는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32명의 전·현직 공무원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 등 인터뷰를 통해 ‘유능한’ 케이-공무원 사회가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분석한 책 ‘정부가 없다’(메디치)에서 작가 정혜승은 서울대 임기홍 박사의 논문을 인용해 “재난은 그 자체가 매우 정치적 현상”이라며 정치화와 정쟁화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재난은 기술적 영역의 문제, 행정의 대상으로만 사고되고 복구 과정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재난은 복구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얼마나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되는 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치혐오’라는 파도 속에 우리는 이를 직시하지 못해왔다. 사실 유가족 등 피해자들의 고립과 외로움을 덜어내는 일은 비단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혐오와 비난과 정쟁을 멈출 수 있는 길이자, 있어선 안 되지만 또 다른 재난에 처할지 모르는 나와 우리를 미리 구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며칠 전 찾은 이태원역 1번 출구 그 골목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30대 직장인이 있었다. 젊은이들 사이 유행한다는 술을 두캔 사 들고 와 향을 피운 그는 “20대 그 친구들을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금 ‘다정한 정부’를 기대할 순 없어도 ‘다정한 연대’는 가능하다. 비록 극우 유튜버나 포털의 혐오 댓글이 요란한 것 같아도 다정한 연대의 힘을 믿는 이들이 내 곁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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