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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행방불명된 ‘모두의 근로기준법’

등록 2023-10-24 18:56수정 2023-10-25 02:41

노동자의 날인 지난 5월1일 서울광장에서 권리찾기유니온 주최로 ‘모두의 권리, 근로기준법 입법캠페인’ 개막행사가 열렸다. 연합뉴스
노동자의 날인 지난 5월1일 서울광장에서 권리찾기유니온 주최로 ‘모두의 권리, 근로기준법 입법캠페인’ 개막행사가 열렸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방준호 | 노동·교육팀장

“토요일 오후 정신없이 바쁘던 일과가 끝나면 나는 넥타이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슈퍼마켓에 들러 소주 두병과 라면을 산 후에~.”

밴드 ‘동물원’이 부른 ‘주말 보내기’를 요즘 종종 흥얼거린다. 가사를 따라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지는데, 노래가 2분25초 만에 끝나고 만다는 점이 아쉽다. 소주 두병 사서 퇴근해 낮잠 자고, 텔레비전 보고 책 좀 뒤적이고 친구 생각하다 잠들면 끝나는 평범한 주말 일상을 노래하는데, 여기서 주말은 토요일 오후에 시작한다. 이런, 이런. 1993년에 나온 노래다.

그때의 근로기준법 탓이라고 우겨보았다. 당시 근로기준법은 주 44시간(5.5일)을 근로시간으로 정했다. 노래는 그 시대 일상을 읊는데, 그 일상이란 게 여러 제도들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 이 노래의 경우 노동시간, 근로계약, 임금 지급 등에서 최소한의 조건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그 제도 구실을 했다. 일과 관련한 당대성의 지표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겠다.

2023년 현재 일하는 이들은 어떤가. 현재 근로기준법(제도)이 표상하는 기준 바깥에 있는 노동자가 너무 많고 심지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휴일과 근로시간, 연장·휴일·야간 근로 수당, 해고 규정,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에서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상용·임시·일용 노동자가 229만명(고용노동부, ‘2021년 사업체노동실태현황’)에 이른다. 한 해 전보다 27만명 늘었다. 근로기준법과 무관한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은 최대 408만명(유니온센터 추산)에 이른다.

“급여가 더 낮은 다른 직원 채용했다고 구두로 해고” “매일 야근하고 휴일 근무했지만 수당은 지급되지 않음”(직장갑질119, ‘노동법 범법지대 5인 미만’).

근로기준법 바깥에서 속앓이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때 ‘모든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보장 법제화’를 공약했다. 대통령 당선 뒤 국정과제 단계에선 ‘모든 노무제공자가 일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사항을 중심으로 제도적 기반 마련’이라고 복잡한 문장으로 변모했으나, 명맥은 유지했다. 믿었다. ‘일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근로기준법의 ‘정부 후견적’ 성격도 그런 믿음에 힘을 실었다. 노동조건을 규정하는 두 축이 노동조합법(집단적 노사관계)과 근로기준법(개별적 노사관계)인데, 이 가운데 근로기준법은 근로감독 등을 고리로 정부가 주도하는 특성을 지닌다. 노조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탄압하던 권위주의 정부도 근로기준법을 통해서는 ‘노동 약자를 위한다’고 폼을 쟀다. 박정희 정권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속에서 (집단적 노사관계는 제약했지만) 상대적으로 개별적 근로관계(근로기준법)는 보호 발전하는 입장을 취했다”(한국법제연구원, ‘한국의 경제성장과 입법발전의 분석’).

하지만 지난 6월 국민의힘 노동개혁특별위원회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밝히기만 했을 뿐,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논의’는 1년 훌쩍 넘게 실종된 상태다. 근로기준법 개정 시도가 한번 있긴 했다. 올해 3월 연장근로시간 유연화. 변죽만 울렸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요란했던 ‘자영업자·소상공인 지원 대책’도 감감무소식인지 꽤 됐다.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쯤 되는 정책 변화를 위해서는 그 충격과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또 다른 제도적 준비 단계가 필요한데, 이쪽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셈이다. 결국 근로기준법 바깥에 있는 노동자와 그들의 사장님은 함께 소외돼 가고 있다.

이쯤 되면 2023년을 규정하는 제도(근로기준법) 바깥의 삶을 얘기하는 노래가 나와도 이상할 것 하나 없겠다. 30년쯤 뒤 가을, 2023년의 현실(노래)을 흥얼대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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