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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형사 피해자의 재판참여권 보장을 위하여 [세상읽기]

등록 2023-10-22 18:58수정 2023-10-23 02:43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류영재 I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공소장만 읽어보면 간단한 사안이었다. 주택가 빈터에서 만취한 피고인이 처음 보는 피해자의 목을 졸라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사안. 피해자의 비명을 듣고 나온 주민들이 경찰을 부르고 피고인을 제압했다. 피고인이 자백했고 목격자도 다수였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비교적 수월하게 정리되었다. 하루에만 수십 건을 재판하는 형사 단독재판에서 특별할 것 없는 자백 사안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법정 진술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피해자는 법정에 나와 피해 경험을 힘들게 재생했다. 작은 체구의 여성인 자신과 달리 키가 크고 몸집이 큰 남성이 갑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던 순간, 아무리 저항해도 목을 잡은 그 손을 떼어놓을 수 없었을 때 느꼈던 절망감. 목이 졸리는 내내 느꼈던 죽음의 공포. 아프다는 자각보다 죽는다는 인식이 먼저 닥쳤다고 했다. 범행 이후 이어진 트라우마와 대인공포증은 피해자를 수개월간 힘들게 했다. 피해자가 일상을 간신히 되찾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간단히 넘어갔을 사안이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폭력 양태 및 치료 기록 등을 통해 검찰이 판단한 이 사건의 범죄 혐의는 전치 3주의 상해인데, 피해자는 이 사건을 살인미수에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도 3주보다는 훨씬 길었다. ‘전치 3주 상해 사건’에서 일반적으로 선고되는 양형 수위에 이 사건 피해의 심각성을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가. 피해자 진술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고민이다.

흔히 형사 피해자는 형사재판의 형식적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재판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에 가깝다. 형사 피해자의 재판 진술권은 대한민국헌법에서 명시적으로 보장된다(헌법 제27조 제5항). 형사소송법은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 외에 피해자에게 의견을 진술할 신청권을 부여하고 있다(형사소송법 제294조의2). 재판장은 피해자의 반복 진술 또는 공판 절차의 현저한 지연 우려 등을 이유로 피해자 진술 신청을 거부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 거부 사유일 뿐이다. 그 외에도 피해자는 법원에 공판기록의 열람과 등사를 신청할 수 있다. 재판장은 피해자 권리구제 등 정당한 사유가 인정되고 심리의 상황 등에 비추어 상당성이 인정될 경우 공판기록 열람 및 등사를 허가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제294조의4).

문제는 형사재판에서 이러한 형사 피해자의 재판 절차 참여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지 여부이다. 재판 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한 범죄에 대한 재판이 개시되어도 법정 진술을 할 수 있다는 점 자체를 알지 못하거나, 법정 진술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백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더더욱 피해자의 법정 진술권은 생략되기 십상이다. 법원 또는 검찰에서 피고인의 자백 여부를 가리지 않고, 피해자에게 법정 진술 신청 의사를 선제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도입할 수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백 사건에서 피해자의 법정 진술은 사실상 증인신문 기일을 추가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므로 재판 부담을 가중시키는데, 이를 법원이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피해자의 공판기록 열람·등사의 경우, 재판장마다 필요성과 상당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다를 것이다. 재량 사안임에 비추어 일률적인 허가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피해자의 공판기록 열람·등사권이 형해화되지 않도록 허가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형사 사법은 본질적으로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사적 복수를 막고 법원이 범죄의 죄질을 규범적으로 판단하여 공적 처벌을 내리는 절차다. 범죄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사적 복수가 금지된다고 하여 범죄 피해 당사자에게 자신이 당한 범죄에 관한 재판 절차를 마치 제3자처럼 바라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오히려 범죄에서 제3자인 판사가 범죄의 본질과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의 경험과 감정을 성실하게 마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법원이 범죄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가해자를 엄벌로써 응징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범죄가 피해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때, 범죄에 대한 좀 더 면밀한 규범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법원의 책무에 관한 얘기다.

(사례는 당사자 특정을 피하기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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